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 / 밥 볶아 먹고 산책하고 라면 끓여 먹는 날
2025_6/26
오늘은 역대급으로 많이 잤다. 오늘 많이 잘 생각으로 어제 새벽 한 시 넘어 늦게 자긴 했지만 그래도 12시간을 잘 줄은 몰랐다. 눈뜨자마자 느껴지는 허리가 뻐근하고 골반이 빠지는 느낌.. 이 고통을 여행하면서도 겪어야 한다니.. 늦잠을 잤지만 여전히 피곤하고 미적거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방이 너무 더워서 결국 샤워를 하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래도 옥상엔 바람이 불고 있어서 시원했다. 오늘 에덴 세노테를 못 간 것이 억울하지 않게도 바람이 불더니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날씨마저 좋았다면 좀 억울했을 뻔했는데 다행이다.
1층에 내려와서 토달볶을 해 먹으려고 보니 누가 토마토 하나를 먹었다. 매우 황당.. 여태 멕시코 호스텔에서 지내면서 처음 겪는 음식 도둑질이었다. 그래도 3개 10페소 주고 산 토마토 중 한 알을 훔쳐간 범인 찾을 것도 아니고, 그도 "어 여기엔 토마토 한알 딱 넣으면 좋겠는데" 하며 훔쳤겠지 뭐..
토달볶을 하면서 어제 맛없었던 리소토 밥을 넣어서 아예 볶음밥을 만들었다. 그게 간이 있고 살짝 무슨 향이 나서 내 취향이 아니었는데, 간이 있어서 토달볶에 소금을 따로 안 넣어도 간이 맞춰지니 뭐 나름 먹을만했다.
주방이 인덕션이 매우 약해서 불 앞에 있다 보니 또 더워졌다. 그래서 그릇에 덜어 옥상에 와서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내일 체투말로 향하는 ADO버스를 예매했다. 다행히 할인석이 남아있어서 490페소 대에 예약할 수 있었다. 원래는 야간 버스를 탈 생각도 했는데 생리 중엔 도무지 할 짓이 아니라 생각되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으니 10시 40분 버스를 예매하고 숙소를 알아봤다.
체투말은 왜인지 저렴한 숙소들은 평점들이 다 안 좋았다. 그래도 혼자 갑자기 7만 원, 5만 원 이런 숙소에 자기엔 너무 아까워서 그냥 평점이 안 좋더라도 16000원 다 호스텔을 예약했다. 체투말은 정말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니까. (그럴 줄 알았지..)
바람이 부니 옥상도 살만해서 아예 세븐일레븐에서 커피 큰 거랑 (멕시티 세븐일레븐 친구가 알려준 맛있는 멕시칸 커피) 도넛 두 개를 사 와서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한 달간의 멕시코의 일정이 끝나간다. 중남미를 4개월 반 예정하면서 멕시코를 이렇게 길게 잡았던 건 땅덩어리가 커서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어서 멕시코에 다시 안 올 거 같아서였다. 그런데 벌써 산크리스토발이 그리웠다. 언젠간 산크리스토발엔 꼭 다시 가고 싶다. 다른 세노테들도 궁금하고, 오히려 멕시코를 여행하며 남은 아쉬움들 때문에 다시 오게 될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옥상에서 밀린 일기들을 쓰고 다음 일정들을 예약하고 있으니 해가 진다. 늦게 일어나니 하루가 짧다.
방으로 돌아가서 내일 떠나야 하니 짐을 꾸렸다. 짐 꾸리고 8시 반쯤 바닷가에 나와봤다. 낮에 본 바다는 너무 안 예뻐서 실망스러웠는데 오히려 밤에 나오니 바람이 선선하고 좋았다.
살짝 습한 바람에 짠 바다 향이 묻어왔다. 이번에도 멕시칸 인디언 공연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여럿여럿 모여 즐거워한다. 나도 누군가랑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괜스레 그런 생각도 해보며 바다를 바라보다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저녁으로 먹을 라면을 꺼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또 땀 흘리며 요리하기 싫어서 토달볶음밥 내일 아침걸 미리 했다. 원래 계란 1개가 남아 먹을 사람 먹으라고 두고 가려다가 토마토 도난 사건에 살짝 맘 상한 겸, 또 리소토 밥이 많이 남아서 그냥 계란을 다 털어 넣고 볶았다. 말은 휘리릭 볶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인덕션 불이 안 올라와서 10분이면 끝날 일을 한 40분 동안 더워하며 불 앞에 있었다. 라면을 먹을 쯤에 땀이 났다.
더워서 정신없이 라면을 다 먹고는 옥상에 올라왔다. 옥상은 그래도 바람이 통해서 시원하다. 내일이면 멕시코의 마지막 도시 체투말로 이동하는 날. 이제 멕시코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 참 새삼스러워서 우울하고 더워서 우울하고 여러모로 싱숭생숭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