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중남미 여행/체투말 이동, 멕시코의 태풍, 호스텔 단수
6/27
오늘은 플라야를 떠나는 날, 아침에 8시에 알람을 맞춰놨는데 어제 한 것도 없지만 피곤했는지 9시에 눈을 떴다. 9시에라도 눈을 뜬 게 다행인 일이었다. 리셉션 직원 콰울이 너 커피 혹시 필요해? 필요하면 마셔하면서 커피가 있다고 알려줬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몰랐는데 아침마다 커피를 마실 수 있나 보다.
커피를 텀블러에 챙겨 올라와서 짐을 후다닥 쌌다. 10시 40분 버스인데 10시 10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콰울이 "너 조심해 여기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있어. 3일은 비가 올 거야" 이러면서 걱정해 줬다.
콰울의 걱정이 유의미하게도.. 몇 걸음 안 가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폭우가 내렸다. 현지인들도 창문에 달라붙어서 사진을 찍어 남길 정도의 폭우였다. 잠시 지붕 아래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금세 그칠 건 아닌 거 같고 이미 시간은 15분이 넘어가고 있어서 터미널로 가야 했다. 결국 태풍을 바로 맞으며 터미널로 출발..
가방의 방수팩을 타고 다리로 흐르는 비가 수돗물을 틀어놓은 것처럼 콸콸 쏟아졌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별다른 소용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윗 옷부터 양말까지 정말 싹 다 젖은 채로 ADO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다행히 가방들은 방수 커버를 덮어서 살아났지만 신발이고 양말이고 위아래 속옷까지 쫄딱 젖은 상태였다.
10:40 ADO 버스는 45분쯤 탑승을 시작했다. 쫄딱 젖은 채로 5시간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지만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비를 맞는 거보다는 낫단 생각을 했다. 창밖으론 이게 배인지 버스인지 헷갈릴 정도로 물이 가득 찬 도로와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찝찝한 채로 잠이 들었다가 깨니 날씨가 개어있었다. 부디 체투말의 날씨도 그러길 바라면서 툴룸, 바칼라르를 지나 채투말까지 4시간을 달렸다. 예약 사이트에서는 4시간 50분이 걸린다고 되어있었지만 실제론 4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다. 체투말에 내리니 다시 비가 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때 30일짜리 이심이 끝나서 데이터가 안되고 오늘따라 ADO 버스 와이파이도 안 잡혔다. 자리를 옮겨가며 겨우 와이파이를 잡아 우버를 불러서 60페소에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비는 여전히 계속 내리고 다행히 3시가 반쯤 넘은 시간이라 체크인은 바로 할 수 있었다. 이미 몸은 찝찝한 채로 말라있고 밖엔 여전히 태풍이 쌩쌩 불고 있었다. 와이파이도 안되고 이심도 안 돼서 애를 먹고 있는 사이 같은 방에 있는 일본인 친구가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일단 난 리셉션에 가서 와이파이가 안 된다고 얘기를 하고 다시 방에 갔더니 샤워하러 간 친구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알고 보니 샤워를 시작하고 나서 미처 끝내기 전에 물이 끊겨버렸단다. 그 친구의 부탁으로 리셉션에 가서 얘기하니 전기 문제라서 고치는데 시간이 걸릴 거 같다고 했다. 그 친구는 거품범벅이라 마시는 물이라도 떠주면 안 되냐 해서 리셉션 직원이 떠주고 갔다.
조금 잇으니 그 친구가 물이 너무 모자라다고 했다. 리셉션 직원은 새로 온 게스트를 응대하느라 바빠서 내가 물을 떠다 주었다. 일본인 친구 물을 가져다주는데 새로 온 게스트가 한국인이었다. 그 친구는 멕시코 시티에서 방금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단다.
샤워도 못한 채로 (물은 계속 안 나왔으므로..) 한국인 친구랑 같이 리셉션 스태프가 추천해 준 피자집으로 가서 저녁을 먼저 먹기로 했다.
근데 생각보다 고급 레스토랑이었음.. 피자는 맛있었고 스파게티는 밍밍했지만 똘랑똥고 이후로 처음으로 한국인을 만나서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내일 멕시코를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에 페소를 털어야 해서 오히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숙소에 오니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단수가 된 게 아직 안 고쳐지고 있었다. 숙소에서 마시려고 사온 맥주 한 병을 마시고도 안 고쳐진 단수.. 더군다나 전기 문제라 밤 9시부터 아침 9시까지 틀어준다던 에어컨도 오늘은 안될 거 같다고 했다.
온몸이 찝찝해서 씻으려고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안된다니..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이랄까 우리 8인실의 남자인 친구 한 명이 취한 건지 약을 한 건지 뭔지 하나뿐인 화장실에서 30분 넘도록 안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화장실 너머로 너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오고.. 또 담배냄새가 넘어왔다. (당연히 객실 내 금연이다)
이 상태로 침대에 올라가기도 찝찝하고 어차피 화장실도 못써서 일단 주방에서 그냥 상황을 지켜봤다. 한 11시 좀 넘어서까지 기다리다 리셉션에 가서 물어보니 이제 진짜, 곧 물이 나올 거라고 했다. 또 한 20분 기다리니 이제 물이 나올 거라고 해서 11시 반에야 샤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얼른 방에 돌아갔는데 아까 화장실에 있던 친구가 아직도 안 나온 상태에 8인실의 게스트들 모두 화장실 때문에 그 친구가 나오길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문을 두드리며 말해도 나오질 않아서 기다리다 지친 나는 리셉션 와츠앱에 연락을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다른 방에서 씻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스태프가 메시지를 받고 우리 방으로 와 빈방 샤워실을 써도 된다고 안내를 해줬다.
상황은 열악했지만 이런 상황과 시설이 이 관리인 친구 탓이랴, 그냥 고맙다고 하고 다른 방에서 씻었다. 여기는 개인실인데 지금은 운영을 안 하고 있는 듯했다. 샤워를 하고 내려가니 그 화장실 전세 낸 친구를 어떻게 꺼낸 건지 방 전체에서 화장실에서 넘어온 담배냄새가 풍기고 그 친구는 사라진 뒤였다.
어쨌든 샤워를 하고 나니 짜증 나고 답답한 마음이 거의 풀렸다. 여행을 하면서 사소한 것에 마음 쓰며 화내는 건 다 내 손해다. 개운하니 좋다! 하고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아무리 긍정 회로를 돌려도 (단수 문제 해결을 기다리느라 이미 1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이었지만) 비바람 때문에 내일 페리가 안 뜰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서 잠이 잘 안 왔다. 그 와중에 취한 친구는 계속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잠을 깨웠다. 핸드폰 가지러 왔다가 다시 들어와서 충전기 가지고 가고 또 뭔갈 가져가고 또 놔두고 가고 이걸 3분에 한 번씩 했다.
경우가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취한 게 아니라 정말 약이라도 한 거면 괜히 건드렸다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냥 못 본 척했다. 결국 새벽 늦도록 걱정하고 신경 쓰느라 겨우 잠에 겨우 들었던 체투말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