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단편집으로 수록된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세 가지 이야기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마지막 이기성], [깊이와 기울기]에 대한 리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남들 다 가는(것 같은) 대학 입시에 실패한 재수생 주미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매일 아침 지나가는 토스트 집 안에 동창생 장의사가 매일 같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앞으로 거기 있지 말아 달라고 연락을 한다.
이곳은 전쟁이라는 수식어도 표현 못할 치열한 불꽃이 타오르는 입시 지옥, 대한민국이니까.
그러니 이 나라에서의 입시 실패가 20살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며 상실감인지,
그리하여 왜 그녀는 인간의 포괄적 도리를 잊고 동창생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다.
한편 그 '장의사'는 장래희망이 수십 번 바뀌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줄곧 '의사'를 고집해온 장 씨 성을 가진 인물인데,
그는 의대에 진학 후 적응하지 못해 휴학을 한 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휴학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아침에 학교를 간다고 나선 후 아버지의 차가 아파트 밖을 나서는 것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그리하여 아버지의 차가 밖으로 나서는 것이 보임과 동시에 자신을 감출 수 있는 토스트 가게에 있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 자신이 가진 실패의 공기가 같은 흐름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자연스레 어울렸다.
작은 실패도 온 세상의 절망을 뒤덮는 그런 계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테다.
한편 그들의 세상을 뒤덮는 또 하나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김조교 형'이라 불리는 사내다.
김 조교면 조교고, 조교 형이면 조교 형이지, 김 조교 형이라 불리는 남자라니.
그는 장의사에게 친절을 베푸는 듯 근처에서 늘 자신이 원할 때면 장의사를 불러내고 쥐 흔들어 댔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김조교 형에게 어떤 식으로 '쥐어졌는지'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이야기 흐름 속 김 조교형의 음습한 친절이 그 방식을 예상하게 한다.
다정함으로 포장된 무도한 폭력은 이야기 후반에 인체 실험에서 '코를 베는' 김조교 형의 모습으로 대변된다.
'코를 벤다'는 서술어가 눈 뜨고 코 베이는 이 극악무도한 세상을 풍자하려는 표현인지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그 표현이 참 절묘하리만치 김 교조의 읍슴함을 드러낸다.
어느 젊은 숨이 꺼져야 했던 이유는 명확히 없다.
어쩌면 이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는 '장의사만의 삶'에서 이유를 밝힐 만한 사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건 이 녹록지 않은 삶에서 장의사는 어쨌든 죽었고,
그를 둘러싼 세계는 김 조교 형으로 대변되는 극악무도한 세계다.
결국에는 그 세계의 희생되고 또 계속해서 그 힘을 견디며 살아가는 두 사람과
그 압력이 별거 아닌 사람(혹은 그것이 어쩌면 체질인 사람), 이 셋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김금희 작가가 그린 세계는 은근한 온기를 건넨다고 하지 않았던가.
압력을 견디어 내고 있는 그녀는 그 계절에 묻지 못했던 안녕을 묻는다.
세상을 떠난 친구를 두고 안녕을 묻는 일이 어쩌면 기만이라고,
그야말로 산 사람 좋자고 하는 일이란 비난은 이 세계에 통하지 않는다.
그때에 물었어야 했던 안녕은 조금 늦었지만, 그럼에도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가지는 건 고작 우리가 그 계절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또 그 기억에 '살아가는' 기억을 덧붙인다는 것으로 통한다.
후반부에 그려진 상담하는 학생에게서 우리는 그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그건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힘이 없는 것이라고.
20살, 21살을 지나는 그 고통스러웠던 장의사에게 안녕을 물으며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물었어야 했다고.
묻지 못한 안녕은 나에게로 돌아와 대답 없는 안녕을 영영 묻도록 한다.
내가 안녕을 물어야 함은 명확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한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다는 것을.
옛 애인의 연락을 받은 남자는 도쿄 곧장 날아간다.
그를 도쿄로 날아가게 한 소식은 '그 배추밭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일본 도쿄의 유학생인 주인공은 동양철학사 수업 답사 후 돌아가는 길에 기묘한 괴롭힘을 당한다.
조교가 4번 객차의 자리가 모자라니 5번 객차에 타라고 했는데,
5번 객차는 중간 지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갈아 끼워지는 것이었던 사건이다.
일본 도쿄에 퍼진 만연한 '혐한' 정서의 피해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한 주인공은 한 여자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는 같은 칸에 타고 있던 같은 수업을 듣던 '재일교포' 유키코였다.
그러나 유키코는 그 차별적 사건에 대해 '차별적 이유'를 배제한 후의 증언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때 주인공과 유키코 사이에 놓인 미학적으로 잘못된 오므라이스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시키는 역할을 한다.
유키코의 태도에 실망해 유키코에게 일장연설을 하는 주인공과 달리
무관심한 듯 보였지만 웨이터에게 오므라이스의 미학을 이유로 교환을 요청하는 유키코의 모습이 그것이다.
'혐한 정서'에 맞서는 시위가 열렸지만, 유키코는 그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다.
대신 공터에 매일 같이 배추를 심는다.
이 배추가 가지는 의미야 말로 주인공과 그 시위자들이 외치던 '그것'이다.
계속 뽑혀나가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 어떤 의지와 신념 같은 것, 그런 것을 유키코는 배추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뽑아가도 다시 심는 일은 어렵지 않다면서.
한편 타임캡슐의 의미도 그 의지로 치환된다.
당대인들이 아득한 미래에 퐁당퐁당 던지는 그 물 수제비에는 그 시절의 그 투쟁의 기억을 담고 싶어 했을 테지.
그래서 유키코는 그 타임캡슐에 '계란'을 넣었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썩은 계란을 열어볼 미래인들에게 "과거는 만만치 않았어"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나 타임캡슐을 속에는 동전 한 닢이 들어있을 뿐이다.
과거의 이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어떤 이해와 의지, 신념, 정의 따위를 던져대지만
현재의 시간에 수용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역시 '그것'들을 미래로 열심히 던지며 살아간다.
이는 인간이 결국 '왜' 사느냐는 작가의 따스하고 열렬한 고찰의 한 면을 보도록 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구나.
그래서 자꾸만 후대의 시간에 자신의 현재를 던져내고 있구나.
또한 그런 우리는 아마도 불완전하겠다.
현재의 우리는 너무도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남기고 싶은 '그것'을 담아 상자에 꽁꽁 싸매서는 흔들리지 않을 땅 속 깊숙이 파묻고 있는 것일 테다.
과거의 시간은 현재로 이어지고 만다.
그 시절의 유키코가 던진 '그것'은 어찌 보면 만만치 않은 과거를 대변하는 달걀 같은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피로와 절망을 연상케 하는 쇠 냄새도 나겠다.
그러나 그 시절의 그들을 기억토록 하는 그들만의 시간의 냄새도 나겠지.
그런 복합적인 금속 냄새를 맡으면서 결국 각자의 시간이 이어져왔듯이,
우리의 시간도 이어져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레지던스 '공가'는 예술가들에게 작업 및 주거 공간을 대여해주는 일종의 공공의 목적을 띈 사업이다.
그 사업에 선발되어 공가에 입주한 주인공은 작고 문명의 이기가 덜 닿은 섬에서 생활하게 된다.
우선 '섬'이라는 공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간다지만
그중에서도 고독하고 고립된 세계를 구축하길 지향하는 집단이 있다면 아마도 예술가들이겠다.
한편 그들을 모아둔 '공가'라는 공간은 그 각자 지향적인 인물들을 이해관계를 떠난 공동체로 묶어버린다.
공동체로 만들어진다는 의미는 섬의 생리를 이해 못 해
택배를 직접 가져가야 하는 일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던 주인공이
어느새 안나와 함께 르망을 고치게 되는 것이다.
열망이 다소 침체된 작가 '기라성'은 르망을 고치며 또 다른 자신의 열망을 꺼내게 되는데
그것은 곧 '삶'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해야만 직업적 가치를 가지는 예술가의 삶,
그 삶에서 그저 살아가는 것이 열망이 되는 일은 그 삶을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일 아닌가.
한편 그 공동체와 시종일관 거리를 두며 개인플레이를 하던 '집단체' 작가는
<베이비스 바스켓, 애기구덕>이라는 의외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주인공의 시점에서는 공동체의 이탈자이자 아웃사이더로 보였던 집단체는
사실 그만의 다른 공동체를 그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그들이 르망을 고치는 시간과 집단체가 동네 주민들을 만나며, 애기 구덕이 있는지 묻고, 그 애기에 대한 이야기나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던 시간은 동시에 흐르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함께 공간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전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각자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누군가를 오해하는 일이 되는 필연 불멸한 경우도 있다.
사는 게 그런 거라며 그 어쩔 수 없는 일들로 쉽게 오해하고 또 단순히 이해하므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한편
동시간 같은 공간을 살아가면서도 어쩌면 따스했을 그의 마음을
켤코 공유하지 못하게 되는 인연이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슬픈 일이 된다.
하라는 예술은 안 하고 대체로 방치된 이들은 르망을 닮았다.
목적 없는 목적을 그리는 예술가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삶이 그다지 목적이 없다는 걸 상기하며,
모순되게도 그러므로 살아가도록 응원한다.
영류의 포기하지 못한 꿈을 비추는 까닭은
우리의 목적 없는 삶에서 귀찮게도 꿈을 꾸게 되는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좌절을 부인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좌절의 연속인 우리네 삶에서 어떤 생채기가 나이를 먹을수록 작아지는 건
우리의 마음의 크기가 나이만큼 제곱을 해서인 거 같다.
그 좌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날들이 모아져서 그 마음의 크기를 키워가는 거겠지.
누군가는 누군가를 오해하고 이해하는 지루한 삶 속 자신의 과제를 외면하고
그 다른 목적을 이뤄내는 둥둥 떠있는 그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무엇들을 가지고 사는 것이 주인공이 바라보는 삶이다.
이 단편집을 대표하는 소설이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인 이유는
그 어디도 아닌 그러나 어느 곳에선가 와 분명히 존재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나보다 이 땅에 더 오래 붙어있던 고택 같은 비 생명체에 엮어가며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실낱같은 삶.
그런 한편, 주인공의 사촌처럼 불합리함이 가득한 세상임에도
그토록 치열히 우직히 살아가는 어떠한 각자의 삶이 있다.
페퍼로니에서 온 우리는 산들바람에 나부껴 대고, 족보의 글들이 주인공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어떤 사연에 중력을 받아 땅에 발을 붙이고, 그런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조금 달리는 것으로 높이 뛸 수 있는 그런 중력의 점도를 가진 이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될 책.
희부윰한 시야, 그리고 후텁한 여름. 지면이 햇빛에 가열되는 그 공기 속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행운은 페퍼로니에서 온 우리에게 있을 리 없겠지만
종종 내리는 소낙비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지구인들도 많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