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할머니 니터를 꿈꾸며
사람들은 내가 뜨개질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웃하며 네가?라는 얼굴을 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뜨개라고 하면 바느질, 자수처럼 여성성을 대표하는 취미 아닌가.
나의 외모는 여성성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키는 작고 서 있는 자세는 삐뚤었으며 커다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니며 욕만 안 했을 뿐 눈매와 표정에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곤 해서 성질머리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대학교 때 취미가 뜨개질이라고 하자 어느 선배가 옆에 소주병을 놓고 담배를 입에 물고 하냐고 했다가 눈에서 불을 뿜는 내 표정에 질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버린 적도 있으니 말 다했네.(대학교 때 소주 한 잔도 못 마실 정도로 내 주량은 형편없었는데, 이 무슨 소리!!!)
내가 생각해도 지구력 없고 인내심 없는 내가 왜 뜨개질을 좋아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한 코씩 시간을 들여 무늬를 만들어 내고 배색이 완성될 때마다 느껴지는 뿌듯함과 내가 보기에는 이래도 굉장히 여성적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반발 심리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건 뜨개뿐만 아니라 심지어 바느질도 잘해서 곧고 예쁘게 해 낸 밖음질을 보면서 나의 야무진 손 끝은 마도 엄마의 유전자를 받아서 인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을 거 같다.
엄마는 곧고 정갈한 분이었다. 성정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손끝이.
안정적인 직장이 없었던 아빠를 대신해 생계를 위해 가게를 해야만 했던 엄마는 젊었을 적 복장학원을 다니고 양장점을 했었다. 그 기술을 살려 내가 어릴 때는 옷 수선 가게를 했었고, 그 이후 자수를 판매하는 수예점을 하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뜨개방으로 전환했다. 모두 손 기술이 뛰어나야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스스로 깨우치고 배워가며 업종을 바꿔나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름 인기 아이템이었던지라 장사도 꽤 잘되었고, 나는 엄마를 따라다니며 엄마 가게에서 파는 자수 물품들을 내 취미 삼았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교 때 뜨개방이 너무 잘돼서 가게에 손님이 가득할 정도가 되자, MT도 마다하고 엄마 가게에서 알바를 할 상황이 되었고 내가 뜨개에 대해서 뭐라도 알아야 판매를 할 것 같아 혼자 일본 뜨개책을 읽어가며 독학으로 뜨개를 시작했다.
제대로 된 배움의 과정 없이 도매상에서 눈으로 귀로 뜨개를 익힌 엄마는 내가 일본 원서를 보며 뜨개를 깨우치는 것을 굉장히 신기해하고 대견해했었던 것 같다. 엄마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나는 책에서 뭔가를 배우면 엄마에게 알려주기 시작했고, 엄마에게 뜨개 기호나 도안 보는 법을 엄마에게 알려주고 책을 해석해 주면 엄마의 노하우와 센스가 더해져 마치 산 옷처럼 깔끔하고 완성도 높은 옷이나 가방이 되었다. 올해 80이라는 연세에도 엄마는 유튜브를 보며 최신 니트 기법을 익혀 옷을 만들어낼 정도니 정말 대단한 양반이다.
어쨌거나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서 15년이 넘는 기간을 직장인으로 살면서도 틈틈이 뜨개를 하다가, 퇴사 후 본격적으로 재야의 고수를 찾아가 워크숍을 듣기도 하고, 아카데미에서 정규 과정을 듣기도 하며 나의 두 번째 직업을 니터KNITTER로 마음먹었더랬다.
그러나...
지금 나는 결국 첫 직장과 같은 일을 하며 여전히 니터에 대한 꿈만 꾸고 있다. 같이 배우던 분들은 이미 공방을 차리거나 클래스를 여는 등 번듯하게 사업을 하고 있지만, 배움의 시간 동안 경제적인 아쉬움이 컸던 나는 손쉽게 다시 돈을 버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경력이 있던 터라 재취업과 이직이 수월하기도 했지만, 대기업에서 월급 꼬박꼬박 받으며 살던 세월과 비교해 니터로서 불확실한 성공 가능성도 나의 재취업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나는 낼모레면 오십이라는 나이에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노후까지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을 찾아 준비하고 있다. 니터에 대한 꿈은 여전하지만 좀 더 뒤로 미뤄두었고 심지어 요즘에는 거의 뜨개를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SNS에서는 니터 세계의 인플루언서들을 팔로우하며 뭘 떠볼까 고민하기도 하고 가끔 도안만 사두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년에 스무 살이 되는 첫째와 중학생이 되는 둘째 그리고 나의 노후를 위해서 좀 더 벌어두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언젠가 우리 동네 한편에 작은 작업실을 얻어 뜨개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차도 한 잔 내어주고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는 다정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어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고 싶다고 소망한다. 뜨개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같은 곳에 얀 페스티벌 yarn festival도 다녀오는 그런 꿈.
할 수 있을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