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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Accident

영화 <콘클라베>

by 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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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사고는 없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 우리가 전조 현상을 인지했느냐, 못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전조 현상을 인지한 이는 충분히 대비하고 사고를 예방할 것이다. 그러나 전조 현상을 무시한 이는 결국 사고를 맞이한다. 다른 경우도 있다. 전조 현상을 충분히 인지했고, 대비하여 예방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세가 형성이 되어, 큰 흐름을 거스르기 어려울 때에는 사고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어찌 되었던,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원인이 있었기에 결과로써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영화 <콘클라베>를 보았다. 기독교의 교황이 서거하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절차를 콘클라베라고 부른다. 영화 <콘클라베>는 전임 교황의 서거로 시작해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며 끝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거론되는 추기경들이 모종의 사고로 인해 낙마하며, 전혀 예상치 못한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이야기이다.


스토리는 콘클라베의 절차와 유사하게 전개된다. 전임 교황의 서거소식이 전해지면, 전 세계의 추기경이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 모두 모인다. 절차에 돌입하면 그 장소를 새로운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폐쇄된다. 별도의 후보등록 절차도 없다. 자리에 모인 모든 추기경이 후보가 될 수 있으며, 콘클라베 절차는 특정 1인이 재적인원의 2/3 이상의 표를 획득할 때까지 투표의 재투표를 거듭하며 진행된다.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카메라는 한 인물로 관객들을 몰아간다.


영화 속 첫 번째 투표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거론된다. 그러나 그중에도 표를 많이 받은 사람과 적게 받은 사람이 존재한다. 표를 많이 받은 사람은 자신이 대세임을 활용해 다시 표를 모으고, 표를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명분과 상대방은 절대 교황이 되면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다른 추기경을 포섭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 자신의 삶 곳곳에서 심어두었던 원인들이 사고처럼 보이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며 교황이라는 자리에서 멀어진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가지 콘클라베를 진행하는 단장 ‘로렌스’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그는 콘클라베를 관장하는 관리자로서 교황이 될 유력한 추기경들의 결함을 어느 범위에서 관리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뇌한다. 그의 고뇌와 고뇌가 만들어낸 행동이 그를 한 지점으로 이끈다. 교황 투표용지에 다른 추기경의 이름을 적어내던 그가, 결국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는 것이다.


로렌스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용지를 들고 투표함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말한다.


Testor Christum Dominum, qui me iudicaturus est, me eum eligere, quem secundum Deum iudico eligi debere.
저의 주님이시며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님을 증인 삼아, 이 표가 하느님 뜻을 헤아려 제가 뽑혀 마땅하다고 생각한 이에게 행사되기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용지에 적기 전까지 로렌스는 다른 추기경을 지지한다. 그러나 콘클라베를 ‘잘’ 관리하기 위한 그의 고군분투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교황 선출 용지에 적는 지점으로 이끈다. 영화는 로렌스가 자신의 이름을 용지에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이유를 보여주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학창 시절 교과서와 학습지를 통해서 배웠던 사회와 과학은 사건 중심이다. 설사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을 함께 배웠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는 것은 중요하면서 동시에 핵심에 닿은 어떤 사건이다. 그 사건에 도달하게 되는 지난 한 과정은 마치 쓸모없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힌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잊히는 것이다. 영화 <콘클라베>에 등장한, 관객에게는 전혀 기억되지 않는,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는, 배경으로만 남았던 수많은 추기경처럼 남겨지는 것이다. 콘클라베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온갖 보이지 않는 일을 처리해 주는 수많은 사제와 수녀들처럼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마치 원래 없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억될 가치가 없는 존재인 것처럼 잊히는 것이다.


나를 감싼 불안에 대한 나의 대응은 둘이다. 하나는 부정이다.


“아니다. 보이지 않는 일을 해주는 수많은 존재는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이 없었다면 콘클라베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역할은 분명히 있고, 심지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수용이다.


“세상에 특별한 존재는 없어. 나 또한 특별하지 않아. 삶의 이유는 특별함을 인정받거나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야. 타의에 의해 태어났고, 자의에 의해 살아가는 것일 뿐. 다른 특별한 의미도 목적도 없어. 그저 살아갈 뿐이야. 그 사실을 받아들여.”


하루에도 여러 번 부정과 수용 사이를 왕복하며,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쓴다. 특히 타인에 의해 내가 부정당한 날이면, 불안감은 극도로 심해지고 왕복 횟수는 증가한다. 잊히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채로, 마음 졸이며 잠에 든다.

결국,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나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 말이다. 어떤 삶이든, 내가 만족하는 삶이라면 충분한 것일 텐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불안감. 내가 만족하는 것보다는 내 삶이, 타인이 보기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보이길 바라는 마음,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부터 오는 불안감. 그런 불안에 이끌려 매일 조금씩 걸어간 길이, 선택한 결정들이 모여 하나의 사건으로 귀결된다면, 그 사건의 끝은 어떨까.


불안에 이끌린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매일,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불안에 의한 선택이 아닌, 내면의 욕구를 따른 선택. 내면의 욕구에 충실한 선택을 해도 괜찮다는 믿음. 그 선택들이 만들어낼 사건을 수용할 수 있다는 믿음.


추기경들이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기 전에 읊조렸던 문구를 다시 한번 떠올린다.

저의 주님이시며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님을 증인 삼아, 이 표가 하느님 뜻을 헤아려 제가 뽑혀 마땅하다고 생각한 이에게 행사되기를 바랍니다.



2025.07.01 365개의 글 중 64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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