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 2
책이 거의 끝날 때까지 ‘모순’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조적식으로 벽체를 세우듯 인물들의 서사를 하나씩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쌓아간다. 소설의 도입부에서는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야기를 아무리 읽어도 무엇이 ‘모순’이라는 것인지, 작가가 말하고 싶은 ‘모순’이 무엇인지, 단서조차도 잡을 수 없어서 당장이라도 그만 덮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계속되었다.
이야기는 중반을 지나면서 속도감이 붙었다. 이야기 자체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화자 ‘안진진’에게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상황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앞부분에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다져두었던 벽돌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밑에 쌓인 벽돌은 상층부의 하중을 받아 더욱 견고해졌고, 견고한 하층부를 둔 상층부의 벽돌들은 기울거나 어긋나지 않고 바르게 쌓아 올려졌다.
나는 오늘 글에서 양귀자 작가의 <모순>에 대해,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모순’에 대해 떠들어볼 생각이다.
이야기는 안진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안진진’의 아버지를 닮은 남자 ‘김장우’와 이모부를 닮은 남자 ‘나영규’. 안진진의 어머니는 일란성쌍둥이다. 태어난 날도, 결혼식을 올린 날도 같은 어머니와 이모는 누구와 결혼했느냐에 따라 인생이 향방이 갈린다.
안진진의 아버지는 가정폭력을 일삼는 자다.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모아놓은 돈을 훔쳐 가출하는 사람이다. 한번 가출하면 일주일 뒤에나 들어왔다. 몇 년 뒤에는 한 달 뒤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마지막 가출은 집에 돌아오는 데 오 년이 걸렸다. 오 년이 걸려 돌아온 안진진의 아버지는 치매와 뇌졸중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 아버지와 살아내기 위해 안진진의 어머니는 점점 모질어졌다.
어머니의 일란성쌍둥이 이모는 우아한 사람이다. 이모는 고급 주택가에서, 근심걱정일랑은 없어 보이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모부는 지연은 일절 허용하지 않는 기차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인생의 모든 단계마다 계획이 있고, 그 계획대로 실천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모부는 계획적으로 설계한 삶에서 상당한 부를 성취했고, 자녀도 모두 해외로 유학을 보내 자녀교육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그런 인물이다. 그런 이모부 옆에 이모는, 돌연 자살을 한다. 도저히 더 이상은 버텨내지 못하겠다는 듯이.
안진진은 나영규와 김장우 사이에서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존재는 누 군인가 고심한다. 그녀는 네 개의 메모를 통해서 반추한다. 네 개의 메모 중 네 번째 메모, “진정한 사랑은 나의 진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를 통해서 안진진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 김장우 임을 깨닫는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 깨달은 안진진에게 두 가지 사건이 닥친다.
첫째, 뇌졸중과 치매를 안고 오 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병시중을 드는 일.
둘째, 행복하기만 할 것으로 보였던 이모의 유서와 자살.
안진진의 아버지를 ‘김장우’로 치환하고, ‘나영규’를 닮은 이모부와 결혼했던 이모. 안진진은 미래를 그렸을 것이다. 만약 안진진 자신이 ‘김장우’를 선택한다면 ‘김장우’도 자신의 아버지처럼 미쳐 버릴까? 만약 안진진 자신이 ‘나영규’를 선택한다면, 그의 계획표대로 살아가다 이모처럼 자신이 자살해버리진 않을까?
나는 당연히 안진진이 ‘김장우’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설령 ‘김장우’가 안진진의 아버지처럼 된다고 하더라도 안진진이 잘 헤쳐나가면 상황은 어찌어찌 흘러갈 것이다. 안진진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영규’를 닮은 이모부와 결혼한 이모는 결국 죽어버리지 않았는가. 나는 죽는 것보다는 지독하더라도 어찌어찌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안진진도 내가 낫다고 결론 내린 선택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 적힌 이야기는 정반대였다. 안진진은 ‘나영규’를 선택했다. 데이트 코스,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해 오는 그의 계획표가 눈앞에 나풀거려 ‘나영규’를 만나는 것조차 꺼려했던 안진진은 결국 ‘나영규’를 선택한 것이다. 자신이 사랑한 이모가 , 누구보다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이모가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죽어버리게 만들었던 이모부와 닮은 ‘나영규’를 선택하고 말았다. 안진진은.
왜?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만약 안진진이 ‘김장우’를 선택했다면, 이 책은 내게 이 같은 여운을 선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진진은 알고 있다. 본인의 선택이 실수일 수도 있음을. 그러나 그녀는 그다음까지 생각하고 있다. 본인의 선택이 실수는 아닐지, 더 나은 선택은 없는지 더 이상 재고 따지는 것을 멈춘 것이다. 그리고 결정을 한 것이다. 실수일지도 모르는, 자신 또한 이모처럼 삶을 던져버릴지도 모르는 결정을 말이다. 그것이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무엇이 모순인가. 자신과 지독하게 닮았던, 동시에 동경했던 이모를 죽게 만든 남자, 이모부와 닮은 ‘나영규’를 선택한 것이 모순인가. 아니면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지만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랑했던 아버지를 닮은 ‘김장우’를 또다시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녀의 마음이 모순인가. 결혼한 순간부터 25년을 지옥 속에서 살아왔던, 그러나 살아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버텨온 안진진의 어머니를, 온실 속에서 살아온 이모가 그토록 부러워했다는 사실이 모순일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모두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보다 자신의 치부는 숨기고 싶은 사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진리가 모순인가.
정리해 보니 책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작가는 한 권의 책을 통째로 공들여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 올렸다. 그렇게 쌓아 올린 이야기에는 작은 부분까지도 논리적 개연성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를 선택하면서도 별다른 설명은 하고 있지 않다. 그저 한마디 던진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작가의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해 이 이야기의 결말을 망가뜨려 놓았는지, 작가의 모순을 나는 다시 한번 곱씹는다.
2025.07.23 365개의 글 중 67번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