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용을 타고 출근을 하는 시간이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집과 직장이라는 공간과 공간 사이 출근길, 또는 퇴근길이 일종의 쉼표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라디오를 듣기도 했고, 음악을 듣기도 했다. 간혹 아무것도 틀지 않고 묵직한 기계소리와 풍절음을 배경음 삼아 생각을 즐기기도 했다. 집과 직장은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 집에선 집안일을 해야 하고, 직장에선 일을 해야 한다. 그 틈에 끼어 있는 출퇴근 길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랬던 출퇴근길도 어느 순간부터는 일로 느껴졌다. 출근길은 직장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 목록을 떠올리는 순간부터 업무시간의 웜업시간이 되어버렸고, 퇴근길은 저녁메뉴로는 무엇이 좋을까를 고민하면서부터 집안일의 웜업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출근길과 퇴근길이 집과 직장을 구별해 주는 갈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책을 사려고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다. 한강작가의 신작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었다. <빛과 실>을 세 권 샀다. 두 권은 선물하고 한 권은 내가 읽을 계획이었다. 도착한 책을 펼쳐본 뒤엔 실망을 했다. 책을 쓴 사람이 한강 작가인지, 출판사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글은 한강 작가의 것이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읽었던 강연록과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전 후로 작가가 쓴 글들이 몇 편 수록되어 있다. 그것들을 한 권의 책에 엮어서 출판해 낸 책이 <빛과 실>이다.
나는 한강작가의 여러 책을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에 읽었다. 부커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은 그전부터도 여러 사람을 통해서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한강 작가의 책을 추천받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읽지 않겠다는 마음이 더욱 커 저만 갔다. 그렇게 아무도 관심 없고, 요란스럽지도 않던 나의 저항은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 무너졌다. 가장 먼저 읽어 내려간 책은 <채식주의자>였다. <채식주의자>의 세 번째 작품, <나무불꽃>에서 나무가 되겠다며 물구나무를 서는 영혜에게, 식사를 거부하는 영혜에게 나는 시선이 꽂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영혜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한강 작가가 궁금해졌다.
그 후로 <소년이 온다>와 <희랍어 시간>을 내리읽었다. <희랍어 시간>을 중간정도 읽었을 때, 한강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상식이 끝난 뒤 찾아본 영상에서 작가는 검정옷을 입었고, 목에는 회색 스카프를 두른 모습이었다. 작가는 단상 위에 올라 작은 목소리로 한국어 강연을 시작했다. 며칠 뒤 한국어 강연 원고를 피디에프 파일로 구할 수 있었고, 나는 곧장 출력해서 읽었다.
제목이 <빛과 실>인 강연 원고에는 <채식주의자>에서부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오는 과정, 과정에서 그 갈피마다 그녀가 가졌던 여러 고민들이 담겨 있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민부터, 나 나름대로는 너무도 치열하게 고민했던 질문까지. 그녀의 장편 세 권을 읽은 뒤였기 때문에 더욱 감명 깊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록 <빛과 실>이었다.
올해 들어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다.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아내와 다른 방향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자가용을 사기에는 지출이 너무 컸다. 과거에 나의 실수로 내 차를 잃었다. 염치없이 새로운 차를 사자는 말이 입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튼튼하고 성능 좋은 전기자전거를 샀다. 전기 자전거를 산 뒤로는 출퇴근길이 다시 쉼표가 되었다. 시속 25km의 속도로 차도를 달리면 자가용을 타고 달릴 때보다 자연이 더 잘 보인다. 바람도 내 피부를 직접 때리고, 냄새도 코로 곧장 들이친다. 전기 자전거 덕분에 변수가 통제되어 있고, 질서가 잡힌 집이나 직장과는 달리 어떤 변수가 언제 나를 덮칠지 모르는 출퇴근 길이 되었다.
며칠 전, 비가 오는 날이었다. 전기자전거를 집에 두고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태양광으로 엉덩이가 따뜻한 정류장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꺼내, 주황색 책갈피가 꽂혀있는 장을 펼쳤다. 두 장이나 읽었을까. 잠시 후 버스 오는 소리에 책을 얼른 접어 옆구리에 끼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았다. 내릴 때가 되어 다시 책갈피를 꽂으려고 했지만 주황색 책갈피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려고 버스정류장에 갔다. 가는 길에 나는, 길바닥에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있는 축축해진 주황 책갈피를 발견했다. 나는 책갈피를 얼른 주웠다. 그날 집에 돌아와 책상 위에 주황 책갈피를 던져두었다.
나는 다시 책 <빛과 실>을 본다. 가격 15,000원. 출판사에서는 성심성의를 다해 기획하고 구성해 낸 책 일 것이다. 왜일까, 나는 한강 작가의 책을 읽지 않겠다고 온몸으로 저항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며칠 전 던져둔 주황 책갈피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책 중간에 책갈피를 꽂았다.
2025.05.12 365개의 글 중 59번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