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걸음, 설계가 먼저인 사람, 행동이 먼저인 사람

by 비린 다슬기

첫 페이지도 해결했고, 아이디어도 해결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글을 이어나가야만 한다.

처음엔 당연히 어렵다. 1 더하기 2가 어렵던 시절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어쨌거나, 글을 쓰는 방식이 크게는 2개, 따지려 들면 더 많은 수로 쪼개어진다.

커다랗게 나눈 방식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계획'과 '영감'이다.


플롯, 시나리오, 시놉시스, 트리트먼트. 이 중 하나는 들어보았을 거로 생각한다.

계획은 이것들을 탄탄하게 작성하고 이정표 삼아 글을 적어나가는 것이다.

어느 때에 무얼 적을지,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인물은 어떤 성격인지를 알고 있으니 초고를 쓰는 시간은 금방이다.

하지만 저걸 작성하는 시간이 있으며, 글을 두 번 쓰고 있다는 기분이 심심찮게 든다.


실제 작품에 끼치는 영향은 몹시나 긍정적이다.

잘 짜인 이정표를 통해 설정을 실수할 일이 몹시나 줄어든다.

거기에 시나리오도 작성도 몇 번이나 재차 확인하기 때문에 기승전결이 깔끔하고 호흡도 제때 활용된다.

그리고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미리 수정하기 때문에, 작품에서 글이 꼬이는 일은 없다.


이것이 계획적인 글쓰기다.

설명한 것보다 더 열정적인 사람은 일반적으로 분량 계획, 각 회차에 나올 이야기 요약, 등등을 더욱더 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건물을 짓는다는 느낌이다.

토지는 튼튼한지, 건물에 문제는 생기지 않는지, 주변에 끼칠 영향, 빛이 들어오는 곳, 통행, 건설 재료 등을 전부 정하고 나서야 건축이 시작된다.

결코 무너트리는 일은 없도록 말이다.


그에 반해 영감은 제법 혼란스럽다. 그런데도 글은 정갈하다.

그들에게 계획은 일절 없다. 떠오른 것들을 무작정 써 내려가며, 즉석에서 다음 사건, 다른 조연들, 분위기, 호흡, 문장들을 적어나간다.

캐릭터의 발자취를 따라가거나, 내가 캐릭터 그 자체에 이입해서 '다음엔 뭘 할까?', '무엇이 나를 들끓게 할까?'라는 질문의 연속이다.


이미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대로서 작동하고 있다.

딱 보기엔 장점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듣기만 해서는 남들보다 초고를 빨리 진행할 수 있다는 것 하나뿐인 듯한데, 이걸 글 쓰는 방식으로 봐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작품에 끼치는 영향에 차별점이 있다.

생동감을 중심으로 하는 1인칭 소설이라면, 실제로 주인공이 할 법한 사건들을 뒤쫓듯 적고 있기에, 의외로 흡인력이 좋은 글이 나오곤 한다.

무엇보다 감정에 이입되어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갈등은, 그저 다른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나 다름없게 된다.

갈등 속에서 호흡은 정말 그 주인공처럼 적힐 것이며, 사람들도 그 이야기에 녹아들 때 작가와 같은 감정에 휩싸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즉흥 연기라고 생각하면 좋다.

원래라면 목소리를 통해 상황과 사건, 인물 관계를 만드는 즉흥 연기가, 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두 가지 방법을 섞은 방식인데, 이를 ‘사건의 씨앗’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어디까지나 내가 사용하는 글쓰기 방식이고, 따져본다면 영감에 가까운 글쓰기라 묶어도 지장은 없다.

그래도 사건의 씨앗은 꼭 소개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아이디어 자체는 빨리 만들어내는 편이다. 잡생각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순간적으로 반짝인 선율을 꺼트리기 싫어서, 언제나 글로 적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영감에 의존한 글쓰기를 하는데, 갑자기 떠오른 인물상, 사건, 시나리오를 곧장 적기에 간편해서 좋아한다.

게다가 나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은 거지, 등장인물에게 내 목소리를 말하라고 시키는 건 영 별로였다.


이런 상황이 맞물려서 나는 글 자체는 되게 많은 걸 적어보았다.

한 작품을 오래 끌어안고 적기보단, 여러 상황과 캐릭터를 적어보며 연습하는 걸 우선으로 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원고지를 버리기도 했다.


마치 아무 의미 없는 글쓰기처럼 보일 수 있다.

실질적으로 완성되는 글은 손에 꼽으니까, 말 그대로 글을 쓰기만 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거의 모든 글은 완성에 이의가 있지만, 여기서 두 번째 마음가짐을 말하고 싶다.


이번 것은 강요하지 않겠지만, 두 번째 마음가짐은 ‘쓰던 글을 버리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다.

언제나 '다시 시작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좋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쓰다 보면 글이 자기 손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영감에 의존하여 글을 쓰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잦다.

되게 직감으로 느껴지는 것이라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자신이 따라가는 것보다 글이 더 빠르게 달려가는 때가 있다.


설정 오류나 글이 재미없다던가,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던가. 이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건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의 코어가 망가져 있거나, 손에서 벗어나는 경우엔 재빠르게 접는 걸 추천한다.


그래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이제부터 내 글쓰기인 사건의 씨앗이 이것에 관련되어있다.


소설 전개의 3요소라고 부르는 것들이, 사건, 인물, 배경이다.

글을 쓰면 필연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반대로, 글을 쓰려면 언제나 저런 것들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글을 여러 번 적고 버리기를 반복하면, 그 과정에서 버려진 인물이나 사건들이 아까울 수가 있다.

나는 그걸 전부 적어두길 추천한다.


그리고 적절한 순간에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직감은 글을 많이 적다 보면 깨닫게 된다.

'아,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사건(인물)이 있다!' 하며 말이다.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에도 이전에 적었다가 버려둔 사건이나 인물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그것에 참고하여 글을 쓰면, 이전의 설정에서 가져오는 것이니 훨씬 쉽게, 그리고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다.


글을 버리더라도, 우린 사건을 만들 씨앗을 충분히 얻어냈다.

덕분에 영감으로 글을 쓰더라도 빠르게 플롯이 잡히는 편이다.

쓰면서 자연스레 플롯이 짜인다는 느낌이 크다.


뭐, 이 정도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지만, 어떠한 방식에 대해서는 결국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나가는 것이 좋다.

‘이러한 장점이 있으니 나도 저렇게 해야지.’라는 마인드는 별로 좋지 않다.

그건 내 문체가 아니니까.


요약하자면 이렇다.


글쓰기는 대개 계획하는 사람과 영감에 맡겨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 써보면서 자신은 어느 쪽인지 파악하고 행동하자.

글을 폐기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끝까지 써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9할이지만, 이 소설이 바로 그 1할이라는 직감은 분명 온다.

망설이지 말고 버리자. 다른 것을 적는 게 더 빨리 실력이 늘 수도 있다.

버린 것들은 재활용의 여지가 있으면 따로 적어두자. 어차피 내 글에서 도용하는 것이다. 한번은 재활용해도 아무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중요한 건 꾸준히 적는 것이다.

‘나는 지금 플롯이나 시나리오를 많이 짜두었으니 괜찮아’는 곤란하다.

물론 ‘나는 지금 영감이 없어서 글을 못 쓰겠네. 오늘은 패스~’도 곤란하다.


첫 번째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전부 틀리게 끼워진다.

결국 우리의 첫 번째 단추는, 우선 쓰는 거다.

내 컨디션이 별로고, 계획이 없어도 일단은 글을 쓰자.


그럼 오늘도, 모두 건필하길 빌며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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