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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 Feb 05. 2021

위대한 유산

할머니의 유산은 역마살입니다

나에게 있어 점을 믿는 기원은 할머니로부터 시작한다. 여든넷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내 삶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내가 외국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사는 걸 두렵지 않게 여기는 것 또한 역마살이 있고 사람을 좋아한 할머니 덕이다.


그 옛날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여기저기 다니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인천에 살고 있는 큰아버지 댁에 거점을 두고 사방팔방을 동네 마실 다니듯이 잘 다니셨다. 그런 할머니를 난 정말 열심히 따라다녔다. 청양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조카 딸네부터 시작해서 유구에 사는 사돈의 팔촌, 온양의 아빠 사촌형네까지 조금의 인과 관계가 형성되는 집엔 모두 다 방문을 했던 거 같다. 할머니가 비행기 타는 게 자유로운 이 시대에 살았더라면 아마 한비야처럼 세상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을까?


내가 어린 시절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동네에서 버스를 구경하는 것은 하루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들은 여기저기 웅덩이가 움푹 파이고 커다란 자갈들이 먼지가 풀썩한 흙 길 위에 여기저기 굴러다녀서 버스가 그 위를 달릴 때면 엉덩이와 허리가 들썩거려  내릴 때쯤엔 머리가 웅웅 거리는 게 마비 상태가 됐다. 그 버스마저도 정거장을 띄엄띄엄 두고 큰 마을에만 서는 바람에 어떤 때는 산을 넘어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을 몇 시간씩 걸어가기도 했다.  할머니의 걸음은 왜 그렇게 재고 빠른지 내 종종걸음이 어떤 때는 뛰다시피 해야 겨우 할머니 뒤꽁무니를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키가 작은 할머니는 비녀로 쪽 진 머리 위에 보따리를 얹고는 손으로 보따리는 짚지도 않고 꼿꼿이 걷는데 어린 내 눈엔 그렇게 신기하게 보였다. 때때로 어린 나는 산길을 따라가다 여기저기 이름 모를 꽃들을 꺾느라 할머니 뒤꽁무니를 놓칠 때가 있었다. 그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할머니 머리 위에  또아리처럼 앉아있는 보따리를 발견하고는 긴 풀숲을 헤치고 잽싸게 뒤 따라잡았다.     


나중에 좀 더 커서 들은 이야기인데 산을 넘고 넘어 한참을 갔던 그 마을이 아빠의 고향이었고 6.25 전쟁 통에 군인도 인민군도 가지 않았던 오지의 마을이라고 한다. 아빠가 열네 살 때 시멘트 한 포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너무 힘들어서 울며 넘었던 산이기도 하고.


열여섯에 시집간 키가 작은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았나 싶게 여덟 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중 둘째 큰아빠가 될 뻔했던 울 아빠의 형님 한 분은 어린 시절 호밀 개떡이라는 걸 먹다가 급체를 해서 저 세상으로 가셨고 나머지 일곱 명 가운데 소아마비에 걸려 몸이 살짝 불편한 넷째 삼촌을 빼고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할머니에게는 자식보다 손주들이 훨씬 많다. 큰아버지가 일곱의 자손을 낳았고 그 뒤로 큰 고모 여섯, 작은 고모 네 명, 울 아빠 셋 등 줄줄이 낳았기 때문에 할머니의 손주는 더합 스물이 넘는다. 그 많은 손주들 중에 할머니는 나를 유독 예뻐했다. 할머니가 나를 예뻐한 데는 할머니 천성을 닮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스무 명이 넘는 할머니의 많은 손주들을 제치고 난 다섯 살 때부터 할머니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사람 사는 세상을 보고 대인 관계의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할머니한테는 신 내림받은 조카딸이 한 명 있었다. 아빠의 이종 외사촌 누나이기도 했던 그 아주머니를 난 '청양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 아줌마는 차령산맥의 한 줄기인 유명한 칠갑산 어느 능선을 따라 듬성듬성 몇 집씩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그 마을엔 버스가 다니지 않아 한 두 시간을 굽이굽이 논길과 밭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야 했다. 산골 마을이지만 다행히도 평지에 자리 잡고 있던 아주머니의 초가집에 도착할 때는 늘 저녁 무렵이었는지 하얀 연기가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한참을 걸어 고생한 내 노고를 아는지 등과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차디찬 손을 꼭 잡아 아랫목 따뜻한 이불 밑에 넣어 주었다.  

그 초가집 옆 켠엔  여러 장군들을 모셔 둔 신당으로 꾸며놓은 방이 하나 있었다. 우락부락 이목구비가 큼직한 장군 몇 명이 그 방에 딱 버티고 있는데 유난히 떽떼굴한 왕방울 같은 눈들이 나를 뚫어지게 보는 것만 같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 방엔 왠지 더 이상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았다. 딱 한 번 들여다보고 그 뒤로는 무서워서 그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아낙네였던 청양 아줌마는 어느 날 열병을 크게 앓고 일어나서 갑자기 신기(神奇)가 생겼다고 한다. 밭을 매다가 비녀를 잃어버린 동네 아줌마의 비녀가 몇 번째 밭고랑 어디쯤에 떨어져 있는 게 보이더란다. 그 뒤로 동네 사람들은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아줌마를 찾았고 아줌마는 소소한 일부터 사람이 죽고 사는 큰 일에까지 관여를 하는 무당이 되었다.

무당은 보통 대대로 신내림을 받은 집안에서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할머니 말로는 그전에 우리 집안엔 무당이 없었고 그 아줌마가 처음이라고 했다.  내가 한참 커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숲이 울창해 충남의 알프스라는 별명이 붙은 칠갑산 굽이굽이로 무당들이 기도를 하러 많이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청양 아줌마가 칠갑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기(神奇)를 받고 무당이 된게 아닌가 싶다.


난 어린 시절 유난히 두드러기 때문에 고생을 했다. 남들은 멀쩡히도 잘 먹는 계란을 먹고 갑자기 허벅지 위에 분홍빛이 우둘두둘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면 그 날은 잠을 다 자는 날이다 . 그 어떤 날이라는 게 특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수시로 그랬다. 어떤 때는 비린 생선이나 돼지고기를 먹어도 온몸 여기저기로 온통 분홍살이 올라와서 온몸을 벅벅 긁어대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툭하면 두드러기 때문에 여기저기 벅벅 긁어대며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위해 할머니는 장독대에 정안수를 떠놓고 빌었다. 어떤 날은 된장을 그릇에 떠놓고 부엌칼을 들고 무얼 싹싹 잘라내는 시늉을 했다.

무당 조카딸이 알려준 비법인지는 모르겠으나 할머니 정안수 덕분에 사춘기가 지나고부터는 두드러기 나던 병이 완전히 없어졌다.



지금은 그 무당 아줌마도 할머니도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녀들의 자취를 찾는지 점 보는 걸 좋아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세상 구경하는 걸 즐긴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물러 살지 못하고  정착이 주는 안정감보다는 신세계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삶을 추구한다. 세상은 넓고 구경할 것은 많은 지구별에서 그 옛날 할머니가 교통이 불편함에도 여기저기 다니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여했듯이 나 또한 살아보지 못한 낯선 곳에서 내 영역을 만들어가며 노마드(Nomad)처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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