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점집 이야기
1994년 대학 합격과 동시에 돈 버는 내 일이 시작되었다. 지방 말단 공무원 출신인 아빠는 삼 남매 중에 장녀인 내가 수능이 끝나자마자 불러 앉혀서는
-앞으로 네 용돈은 스스로 벌어서 쓰거라. 말단 공무원인 아빠 월급으로는 동생들 뒷바라지하기도 힘이 부친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빠 입에서 돈 없다. 아껴 써라. 월급날까지 기다려라라는 말을 하도 듣고 자라서인지 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골 소녀였던 내가 아무리 야무지다고는 하나 누가 주던 용돈이나 모을 줄 알았지 어디서 돈을 벌어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대학 가면 집을 떠나야 하고 용돈을 벌어 써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아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벼룩시장 전단지를 보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한 내 일은 출산과 산후조리 때를 제외하고는 마흔일곱이 된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남편 중국 유학을 따라가서도 내 일은 끊이지가 않았다. 8월 말에 중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는데 그 해 10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타국에 나가면 돈 버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전생에 소가 된 게으름뱅이가 나라서 이번 생엔 일 좀 하라고 내려보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일에 쉼이 없었다.
중국에서 일을 하려면 취업 비자가 필요했다. 그래야 나중에 누가 공안에 신고를 해도 걸리지 않고 떳떳하게 일을 할 수가 있다. 결혼 15년 만에 취업 비자를 받겠다고 3박 4일의 휴가를 얻어 혼자 한국에 갔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서둘러 비자 대행 사무실이 열자마자 여권을 맡겼다. 사무실이 종각 역 근처라서 난 얼른 인사동 쪽으로 넘어갔다. 인사동은 20년 전이랑은 완전 분위기가 바뀌어 세련되었지만 여전히 고풍스럽고 여전히 고즈넉했다.
어느 가게 앞을 지나는데 말간 유리창 위에 “사주 봅니다”란 글자가 전화번호와 떡하니 붙여져 있다. 한국에 왔으니 오랜만에 점이나 보러 갈까? 원래부터 점 마니아였지만 해외에 머무른다는 이유로 몇 년 동안 못 갔던 철학관을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찾았다. 점집은 인사동 끝자락 파고다 공원 초입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간판 이름이 미래 역학 연구소다. 미래를 얼마나 알려줄까?
오십 대의 학자 같은 분이 본인 이야기가 실린 신문 기사를 벽에 붙여 놓고 커다란 원목 책상을 두고 반겨준다. 기사 내용을 보니 이 계통에선 제법 알려진 분인가 보다. 본인 소개를 한참 하고 나서 드디어 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을 묻는다. 난 묻는 기본적인 정보만 알려주고 어디 잘 맞추나 보자라는 심산으로 아무 부연설명도 없이 역학 선생님의 풀이를 기다렸다.
-옛날 같으면 배 타고 나가 해외에서 돈 벌 팔자네요. 고향이랑은 인연이 박해요. 외국에서 사는 게 좋겠어요. 일이 남들보다 두 배가 많네요. 집에서 장녀이고 외며느리 맞죠? 대신 남들보다 에너지가 두 배로 많아서 거뜬히 이겨낼 수 있어요. 외모는 여자 같지만 속에는 장군이 살고 있네요. 남편 덕을 못 봐요. 남편 운이 미비해요. 공방살도 있어서 남편이랑은 가끔씩 떨어져 지내는 게 좋겠네요. 그래도 평생 돈 걱정 안 하고 외국에서 일 잘하며 살 팔자예요.
외국에 나가 산다는 눈치는 전혀 비치지 않았는데 첫마디가 외국에 나가 돈 벌 팔자란다. 두 시간 가까이 밑바닥 신상까지 탈탈 털린 거 같은 기분으로 내 운명에 대한 풀이를 듣고 철학관을 나왔다. 남편 복이 없다니 제길이라고 해야 할지 외국에서 살아도 평생 일복이 많다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내 운명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결혼을 안 했어야 하는 건지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하지만 내 운명에 대한 주사위는 이미 저만치 던져져서 신의 뜻대로 떼굴떼굴 잘 굴러가고 있다.
난 결혼은 했지만 남편이 아직까지 공부 중이라 덕은 못 보고, 10년 넘게 외국에서 살며 일도 잘하고 있으니 운명대로 잘 살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