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태어나 자란 둘째 아이를 보면 간혹 사람들이 묻는다. 태어난 나라에서 국적을 주는 경우가 있으니 나라마다 법을 모르면 당연히 궁금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 북간도이고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일본 출생이라고 했을 때 나에겐 참 생소했다. 남다른 사연이 그들에게는 있을 것만 같았다.
연어도 새끼를 낳을 때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그때 난 왜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남다른 사연을 만들었는지.
지금에 와서 후회는 없지만 넌 왜 스스로 버라이어티 한 인생을 자꾸 만드냐고 묻게 된다.
2008년, 나는 서른 넷이었지만 여전히 유학생 부인이었고 딸아이가 여섯 살이 되어 손이 덜 가니 육체적으로 많이 편해졌다.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북경 올림픽이 개최된다고 나라 구석구석을 싹 개조하고 하루가 다르게 주변 환경이 살 만하게 바뀌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유학생 부인이지만 나날이 괜찮다 싶었다.
그 해 방학 겸 설을 쇠러 한국에 다녀오는 공항버스 안에서 자의인지 타의인지 갑자기 딸아이가 “엄마 동생 갖고 싶어.”라는 깜찍한 말과 함께 정말 계획에도 없던 둘째가 생겼다.
맙소사!
임신일 걸 확인하고 정말 뱃속 아이에게 미안하게도 눈물부터 쏟아졌다. 첫애 모유수유를 다섯 살이 될 때까지 했던 터라 이제 숨 좀 돌리고 살겠구나 싶었는데 다시 육아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아무리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계획 없이 태어난다지만 나는 왜? 특별하지 못하고 이 절반 인구에 동조를 하고 사는가.
임신 절차대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산모 나이 서른넷에 첫째 출산 경력까지 있다고 하니 내 이력을 본 의사 첫마디가
"야오, 뿌야오?(要?不要)"
정말 오~마이갓!이다.
한국 드라마에선 이럴 때 “임신입니다. 축하드려요!”라고 그러던데 애 필요하냐 필요 없냐 소리부터 듣다니 부끄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래, 나 계획에도 없는 임신을 했고 게다가 노산이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왜 다른 나라 의사한테까지 이런 말을 들어야 해.’
당신은 의사라는 사람이 생명을 두고 이따위 질문을 하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야오!(要)"라고 최대한 힘주어 말하고 그다음 진료 약속을 잡지 않는 걸로 불편한 내 심기를 표현했다.
사실 중국은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둘째를 거의 낳지 않는다. 아무리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전이라지만 이미 뱃속에서 생명으로 자리 잡은 아이는 영혼으로 다 느낀다고 했다. 처음 맞을 때의 내 죄책감이 다 씻기기도 전에 직설적으로 인권을 무시하는 태도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의사한테 첫 진료를 받은 게 뱃속의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차피 넌 하늘이 주신 내 운명이니 우리 건강하게 엄마 뱃속에서 지내다 만나자. 엄마에게 주신 선물이니 기형아 검사도 하지 않고 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어.
이때까지만 해도 난 가정분만을 꿈꾸진 않았다. 그냥 어느 정도까지 뱃속에서 키우다 때가 되면 병원에 가서 낳든지 한국에 가서 첫째를 낳은 조산원에 가서 낳든지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날이 배가 불러오면서 여러 요인이 가정분만을 원하는 마음이 들게 했다. 특히 알음알음 알게 된 중국 산부인과에서 출산한 한국 엄마들 대답은 제각각이었지만 내 결론을 하나로 모아 주었다.
“여기에서 이 얼 싼! 저기에서 이 얼 싼! 간호사들 여럿이 소리치는 바람에 누구 장단에 맞춰 힘을 줘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회음부를 너무 찢어 놔서 아파 죽는 줄 알았어요.”
“병원비가 너무 비싸요. 우리 외국인은 무조건 VIP 병동 1인실로 가라고 하니까 자연 분만은 3만 원(3万元), 수술은 6만 원(6万元)이에요.”
2008년은 전 세계가 금융위기를 맞아 환율이 정신없이 급등을 하고 있었고, 유학생인 우리 형편도 좋지 않아 내가 힘을 잘 주어 아이를 자연 분만으로 낳는다 해도 우리나라 돈으로 최소 600백만 원이 필요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아이 하나 낳으면 지자체에서 돈을 막 주기 시작하던 때인데 중국은 인구가 많으니 둘째를 낳으면 벌금을 내든지 공무원들은 밥줄을 끊든지 해야 하던 때이다. 산아정책에도 불구하고 인구수가 세계 탑인 중국은 사실 어느 병원엘 가도 한나절씩 줄을 서야 하지만 2008년 그 해 산부인과는 올림픽 기념주화를 만들 듯 베이비들을 기념으로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 집에서 낳자. 남편이 아직 학생이긴 하지만 의대에 다니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가정분만을 도와주는 조산사가 있는데 중국처럼 큰 나라가 없겠어? 어떻게든 집에서 낳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겠지.’
나는 늘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일단 하고 보자'라는 생각이 앞서 다른 생각은 접어버리는 단순한 인간이다.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다 말다 하는 내 신앙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고 난 기도제목이 <가정분만으로 아이를 무사히 낳게 해 주세요>가 되었다.
11월 8일 한 밤, 텔레토비처럼 몸이 불어서 옆에서 툭 치면 뒤로 벌렁 넘어갈 만큼 되어 버린 내 몸에서 이슬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곧 아기를 만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도 덕인지 아이를 집에서 낳을 수 있는 기적 같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첫째 아이를 낳은 한국 조산원에서 소개해준 조산사 선생님이 때마침 남편과 같은 학교로 유학을 온 덕에 계획했던 대로 아이를 집에서 맞게 되었다. 아이는 예상대로 몇 시간의 진통 끝에 다음 날 낮이 되어서야 나왔다. 배 아파 죽겠다는 내 옆에서 사주 보고 좋은 시간 맞춰 나오라는 남편의 주문은 무시한 채 아이는 자기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그때 둘째를 받아줬던 이순옥 선생님은 공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며 아이가 태어나고 그 해 12월에 아프리카로 자원봉사를 떠났다.
중국은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고 절대로 자기네 국적을 주지 않는다. 자기 나라 인구도 많아 산아제한을 하고 있는 터인데 외국인까지 자국민으로 받아줬더라면 아마 넘치는 인구를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또한 중국이 아무리 대국이고 나날이 경제 발전을 하는 무시무시한 나라가 된다고 해도 중국 국적을 원하지 않았다. 그냥 비자가 있어야 거주와 이동이 가능한 나라이기에 한국 여권에 중국 비자만을 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집에서 낳은 내 아이가 불법으로 태어났다고 비자를 내줄 수가 없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 나서 안 일이지만 중국은 가정분만이 불법이었다.
할렐루야! 하며 가정분만을 무사히 마친 우리 아이가 순식간에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됐다.
중국 상하이 출입국 관리소는 어떤 외국인이 불법으로 아이를 낳아서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비자를 주긴 줘야 할 텐데 무슨 근거를 바탕으로 이 아이가 당신의 아이 인걸 증명하라고 할 건지 꽤나 연구를 하고 고심을 하며 여기저기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거 같다. 우리는 우리대로 상하이 한국영사관에 전화를 해서 사정을 하며 제발 우리 국민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이런 와중에도 설마 갓난아이를 추방까지 시키진 않겠지? 한편엔 이런 믿음이 있어 무슨 방법이든 생기겠지 싶었다.
출생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던 유전자 검사를 해오면 비자를 주겠다는 거다.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닌 거 같을 때, 혹은 출생이 묘연했던 사람의 친부모님을 찾을 때나 하는 줄 알았던 유전자 검사를 멀쩡하게 내 배 아파서 낳은 게 확실한 내 아이를 데리고 가서 하란다. 그것도 병원이 아니고 범죄자들이 포승줄에 묶여 눈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상해시 법의학부에 가서. 출생 후 병원 근처엔 가보지도 못했던 둘째는 생후 한 달도 안 되어 유전자 검사로 피를 보는 고통을 겪고서야 비자를 얻었다.
모든 일은 해결되기 마련이다. 난 이 순간을 불법 체류자가 될 뻔했던 피 마르는 순간이라고 기억하기보다는 남들이 가지 않은 나만의 길을 고집하다가 색다른 경험을 했던 순간이라고 기억하고 싶다. 외국에 살면서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안 겪어도 될 일들을 겪지만 이런 순간들이 지나고 보면 다 추억이었고 지금 나로 살아가는 힘을 주는 짜릿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때의 힘듬은 아스라이 사라져 가며 아련한데 유전자 검사를 받고 내 핏줄이 틀림없음을 증명한 둘째는 현재 짜릿한 원동력에 더해 머리 끝까지 쭈뼛 서게 하는 괴력까지 만들어주어 좀 더 스펙터클!! 하게 살라고 힘을 보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