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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 Feb 14. 2021

여전히 맹모삼천지교는  내 인생철학이 아니다

꿈꾸는 사람이 아름답다. 여전히 아름답기를

“또 옮겨? 너는 애들 생각은 하나도 안 하니? 애들이 또 낯 선 곳으로 가서 적응하려면 힘들 텐데. 그것도 시안(西安)은 환경이 안 좋다며. "


6년 살던 상하이(上海)에서 서북 도시, 깊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되어있어 공기 안 좋기로 유명한 시안(西安)으로 옮긴다니 친구가 한 마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6년 후 아이들을 데리고 이젠 아예 나라를 바꿨다.


큰 아이가 올해로 만 열일곱 살이 됐다. 17년 동안 큰 아이는 총 세 나라 다섯 군데의 행정 구역을 거쳐 여섯 번째 학교를 다니고 있다.

지역을 바꾸거나 나라를 바꾸는 사유가 아이들 학교와는 한 번도 연관이 없었다.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는 남편의 유학 때문이고 시안(西安)은 가로등에 적힌 고시(古诗)에 반해 공기 나쁜 건 눈에 안 들어온 내 우매함 때문이다.

그나마 말레이시아로 옮긴 이유는 교육적 목적이 조금은 있다고 해야하나.  친한 가족이 말레이시아 이민을 고려한다며 답사를 간다길래 여행 좋아하는 우리도 냉큼 따라나섰다. 그 후로 우리는 세 번의 여행을 더 했고 그때마다 여행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순수한 웃음과 친절함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 난 이 편안한 친절함이 아이들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길 바랬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행복해진다고 믿었으니까.


맹모삼천지교(孟母三迁之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교육에는 주위 환경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이르는 말


한국인과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이 문구를 난 중국에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이 강남신화 강남불패라는 말이 교육에서 비롯됐듯이 중국도 각 도시마다 학군을 바탕으로 집값이 높이 형성되어 있다. 심지어 중국은 집을 소유하고 있으면 집 근처 학교에 갈 수 있는 우선 순위권을 부여받기도 하고 유치원 비용도 할인을 받는다. 그래서 좋은 학군 근처는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오르고 있는 강남신화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회적인 현상을 맹모삼천지교의 원조 나라 답다고 해야 맞는 걸까?


하지만 나는 맹자의 일화를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맹자가 묘지 근처에서도 살아보고 저잣거리에서도 살아봤기 때문에 인간사를 깨닫고 여러 좋은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은 게 아닐까 싶다.

맹자 엄마 입장에서는 묘지 근처에서 사람들의 곡소리를 듣고 그걸 흉내 내는 것이 못마땅했겠지만 맹자는 아마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수많은 죽음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저잣거리에선 장사치들과 서민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여러 경험들이 모여 수많은 명언인 맹자왈~을 만들었다고 본다.

사람은 글 안에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 우리가 흔히 간접 경험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나름 그 안에서 주는 묘미가 있지만 직접 몸소 겪는 것들은 평생 살아가는데 단단한 버팀목으로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


세상 사람들이 정한 잣대로라면 난 상하이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정착하고 살았어야 맞다. 상하이는 교육 시스템부터 남달랐고 우리 큰 아이가 힘들게 재시험까지 보며 들어갔던 대만 학교는 영어와 중국어를 함께 배워 아이를 글로벌 인재로 키워줬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때로는 선택을 잘 못 해서 그 자리에서 멈칫거리며 잠시 주저앉을지라도 그걸 어떻게 이겨내는지 라이브 생중계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이기에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자라나길 바랬다. 아이들 꿈에 대리만족을 하는 엄마가 아니라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다고 믿었다.


드디어

난징에서 2년, 상하이에서 6년을 공부한 남편 공부가 끝나며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중국 의사 자격증까지 손에 넣은 남편은 미국으로 옮기길 원했지만 난 중국에 더 머무르고 싶었다. 왠지 중국에 못다 한 일들이 더 남은 것만 같았다. 몇 년을 남편 뒷바라지를 했으니 이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차례가 됐다고 생각을 했다.

마침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유명한 시안에 삼성이 전 세계 가장 큰 규모로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내가 막 일하기 시작한 부동산에서도 그쪽에 지사를 내고 분양을 한다 길래 얼른 가겠다고 자진 지원을 했다.

 “삼성이 들어오니 한국 의사가 필요할 거야. 우리 시안으로 가자.”며 망설이는 남편을 부추겼다.


시안(西安)은 내가 옮기던 그 해 막 주석이 된 시진핑의 고향이기도 하다. 공기가 안 좋아 짙은 안개가 자욱한 도시는 척박한 황무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도 30대였고 젊은 열정은 뿌연 안갯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황무지에 들꽃을 한가득 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그 척박함이 내겐 기회의 땅으로 보였으니까.

결정적으로 나를 시안(西安)으로 붙들어 머물게 한 건 취장(曲江)에서 만난 가로등이다. 부동산 견학 삼아 갔던 낯 선 거리 한 모퉁이에 길게 늘어서 있는 가로등에 적힌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고시(古诗)를 보고 고대의 낭만을 존중할 줄 아는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삭막하고 건조해 보이는 도시에서 이 가로등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시안으로 옮기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그곳에서 6년을 류실장이란 명함을 달고 일에 푹 빠져 살았다.

어린 아들은 유치원이 끝나고 집 앞에 설 때마다 내 옷자락을 잡고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엄마, 또 나가 안나가?”라고 물으며 내 마음을 저리게 하고

상하이와는 교육 환경이 많이 달라 학교 생활이 힘들었던 큰 딸은 6학년이 되어 사춘기를 맞으며

“엄마, 나 학교 안 다니면 안 돼? 그냥 검정고시 볼래.”라며 하루하루를 주저앉고 싶은 마음으로 살게 했다.

하지만 난 내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혼자 밖에 놀러 나가서는 묻지도 않는 동네 한국 아줌마들을 붙잡고는 씩씩하게 “우리 엄마 류 실장이에요~. 난 류실장 아들이구요.”라고 외치고 다니는 작은 아이와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하고는 달라. 정말 열심히 사는 모습이 멋져.”라고 말해주는 큰 아이,

그리고 무엇보다 난 내 일을 사랑하고 일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감사했으니까.  


말레이시아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나서 작은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 이제 일 그만 할까? 돈은 조금 없이 살아도 엄마가 맨날 같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아니. 엄마 일 계속 해. 돈 벌어. 난 엄마 일하는 게 좋아.”

빈곤이 두려운 건지 일하는 엄마 모습이 좋은 건지 애매한 대답을 했지만

아들의 이 한마디에 난 또다시 힘을 내어 중국과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여전히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난 또 꿈꾼다. 내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오롯이 내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가겠다고.

난 아이들에게 맹모 엄마의 모습은 아니지만 평생 꿈은 품어야 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행복한 엄마였다고 기억되길 바란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날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올 것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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