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 둔 보물의 세목(细目)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작고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 과거를 다시 사는 데 있는가 한다.
<피천득 ‘인연’ 중에서>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피천득의 수필을 읽고 처음으로 '인연'이라는 말이 주는 아름다운 울림이 내 맘속에 콕 박혔다. 아직 어려서 인연이 주는 이런 풍성한 마음을 느껴보진 못했지만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기보다 좋은 인연을 많이 만들며 사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피천득의 인연처럼 다른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랬다. 나를 생각했을 때 저절로 따스한 웃음이 지어진다면 난 부자가 아니어도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찾아다니는 할머니의 영향권 아래에서 자란 덕인지 16년 동안 해외의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귀한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신기하게도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도시에 여전히 머물러있어 난 때때로 그들을 찾아가 추억을 되새기며 같이 나이 들어감을 확인하고 온다. 그들과 내가 아직도 이 지구 상에 건재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사람보다 더 큰 재산이 없다는 옛말에 감탄을 하게 한다.
샤오지치엔은 위 내용에 하나도 위배됨이 없는 중국에서 만난 첫 외국 친구다.
내 인연이 중국에서 살고 있으리라고는 까맣게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꼭 만난다고 했던가! 샤오지치엔을 만나는 목적도 내가 중국에 간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리라.
샤오지치엔과의 첫 만남을 소환하기 위해선 16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절을 더듬다 16이라는 숫자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우리 나이에 깜짝 놀랐고 이 긴 세월 동안 우리에게 아주 큰 장애가 없음에 안도했다. 2005년 가을 중국에 간 지 두 달이 넘어가니 슬슬 친구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나와 두 돌을 막 넘긴 딸은 언어도 안되면서 동네를 팔랑팔랑 잘도 돌아다녔다. 매일이 새로운 나날이었지만 정서적으로 교감을 나눌 친구가 없으니 가슴 한구석이 휑하니 허했다. 그 날부터 나와 어린 딸은 잠들기 전에 두 손 모아 기도를 했다.
‘우리 두 모녀에게 친구를 주소서.’
정확히 기도 며칠 째인지는 기억에 안 난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우리는 남편이 유학하던 학교 바로 근처 은행 직원들에게 배급처럼 나눠줬던 낡은 6층 건물의 4층에서 월세를 살았는데 그날도 여느 때처럼 딸과 나는 동네 구경을 나간다고 밖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이라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가며 딸은 며칠 전 계단에서 굴렀던 일이 생각나는지 떼굴떼굴 떼굴떼굴 노래를 부르며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도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감지했다. 우리와 똑같은 풍경의 두 모녀가 반대로 계단을 오르려고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닌가!
한눈에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니 하오. I live here. 쓰로우(4楼). 一起(같이)play.
몇 마디 아는 중국어와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떠듬떠듬 처음 보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니
“ok, 一起(같이)play 一起(같이)play.”
그녀 또한 혼잡의 언어로 답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됐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단순한 이 말은 우리 일상 속에 자주 진리처럼 얼굴을 내민다. 바로 우리 윗집인 5층에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河海大学(하해 대학교) 도서관 사서인 그녀를 이사한 지 세 달만에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녀와 나도 동갑, 우리 딸들도 동갑, 남편들도 동갑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친정아버지와 우리 아빠의 나이마저 48년 쥐띠 동갑이라 우리는 이건 인연을 넘어 연분이구나 싶었다.
우린 각자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동시대를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반가워 놀라운 공감대가 형성됐다. 더욱이 내가 중국어를 못해 떠듬거리며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 쓰고도 모자라 몸의 언어로 소통을 했음에도 우리는 자주 만났다. 어떤 날은 각자 음식을 해서 한 집에서 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샤오지치엔의 친구를 같이 만나기도 하면서 우리는 진짜 친구 사이가 되어갔다.
하루는 그녀가 시댁에 같이 놀러 가자고 했다. 한국 문화에서는 시댁에 며느리 친구 가족을 데리고 간다는 건 좀처럼, 아니 아예 생각하기 힘든 일인데 그녀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내 친구네 집에 가자 정도의 가벼운 뉘앙스로 제안을 했다. 중국어는 여전히 못하지만 놀러 가는 건 '지옥만 아니면 다 가리라'던 나의 자세는 샤오지치엔의 시댁 앞에서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 가자.”
그 날은 소풍을 가도 좋을 만큼 화창한 하늘빛이 좋은 날이라 우리 세 식구는 봄나들이 가듯이 그녀의 세 식구를 따라갔다. 공장을 운영하는 그녀의 시부모님은 난징(南京) 외곽 풍경 좋은 별장촌에 자리 잡고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내 대학가에서 차로 한 시간도 넘게 갔던 거 같다. 그 별장촌은 아예 작정을 하고 형성된 마을이었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둘레길에 듬성듬성 지어진 별장들은 텔레비전에서 보던 중국의 초라한 농촌의 모습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화려함을 드러내며 "부자 마을에 방문한 걸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중국의 부자들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다더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은행 직원들 숙소는 그냥 그녀 가족들이 편리상 머물러 있는 소박한 공간이었던 거다.
샤오지치엔의 시부모님은 며느리 친구일 뿐인 우리를 환대해줬다. 그저 차나 한 잔 주면 될 것을 그녀의 시아버지가 직접 요리를 했다. 식탁에 앉았을 때 우린 "와~!"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시아버지가 음식을 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열 가지가 넘는 요리들이 차려져서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 시아버지한테 밥상을 받은 기분은 신선 하다 못해 황송할 지경이었다. 뭐라도 도와야 할 것 같았지만 며느리인 그녀조차 손님으로 대접받는 그 집에서 난 그저 집 둘레길을 구경하며 그녀와의 우정을 돈독히 하는데 집중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얼마 후 난 그녀의 친정 집에도 초대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샤오지치엔이 어렸을 때부터 찍어 놓았던 사진과 상장, 여러 추억의 작품들을 편집해서 컴퓨터에 보관해 둔 걸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어릴 적 모습을 되새기며 함박웃음을 지으면서도 그 시절이 그리워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난 그녀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즈음 그녀는 와인 한 병 때문에 남편이랑 싸우고 이혼을 하네 마네 하던 때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매 순간이 아까워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그녀의 일상이 눈물로 얼룩지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딸 친구 앞에서도 감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다행히 현명한 그녀는 그때 위기를 잘 넘기고 10년 후 중국 정부의 한 자녀 정책이 폐기되자마자 늦은 나이에 아이 하나를 더 낳았다.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상하이를 거쳐 시안으로 이사를 했지만 우리의 깊은 인연은 계속 이어져 그녀의 둘째 딸아이를 보러 다시 난징을 방문하는 행운을 누릴 수가 있었다.
16년 동안 우리에게 계속 행복한 소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난 친정 엄마가 돌아가셨고 그녀의 아빠는 암 수술을 해서 우리가 슬픔을 공유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감을 깨달았다.
어제 오랜만에 그녀와 위쳇(한국의 카톡과 같은 것)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 지금 네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어.”
“매우 감동이야.”
“엄마, 아빠는 잘 지내고 계셔? 난 너랑 너네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 나?”
“기억하지. 우리 둘은 집 앞에서 각자 아이들이랑 있었어. 우리 두 사람은 손짓+영어+중국어로 소통을 했지. 이때부터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어.”
“너는 중국에서 만난 내 처음 친구이고 영원한 나의 벗이야.”
“동감이야.”
샤오지치엔과 나는 여전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의 생로병사를 함께 나누고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시시 때때로 보고하며 세월이 이제는 달리는 말과 같다고 한탄을 한다. 우리가 나이 들어감을 애틋해하며 그래도 서로의 예쁜 시절을 기억하고 있노라고 다독거리며 살고 있다. 난생처음 겪는 코로나 앞에서 인간이 이렇게 무력했냐며 위로의 말도 나눈다.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계단 앞에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음을 첫눈에 알아봤으며 짧은 찰나의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인연으로 만들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내가 이렇게 떠도는 인생이 아닌 동네 붙박이 그늘 나무 같은 모습으로 살고 싶다. 지금처럼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인연이 아닌 짝짝이 신발을 신고도 한걸음에 달려가 희노애락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기다림은 짧고 만남은 긴 인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