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발췌

by 서민재

2025-11-22-토요일~ 25일 화요일 (이어서 씀)


어제 시사회가 끝났다.


시사회는 조금만 있다 나와서 기억이 많이 없다. 메일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색하게 얘기하다가 워치로 온 알람을 보자마자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동적인 게 아닌 고르고 고른 말들로 단호하게 의지를 전하는 말이었는데 그땐 너무 불안해서 전화할 일이 있다고 술집에서 뛰쳐나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일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아서 카톡을 보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읽더니 전화나 만나는 건 안될 것 같다고 했다. 마음을 누가 도려내는 것 같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느낌과 동시에 아빠의 장례식장 앞에서 느꼈던 갈 곳 없는 허무와 공허감이 몸을 감쌌다. 내 시도가 또 무너지는구나. 현실적으로 죽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옥죄고, 차가운 공기가 겹치면서 다리가 저린지도 모르고 앉아 있다가 오늘은 시사회에서 친분 같은 걸 쌓긴 글렀다는 생각에 급하게 짐을 챙겨 택시를 탔다. 택시에서 물어봤다. 카톡으로 물어보면 답변은 해 준다고 했다. H가 나도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해서 순간 의아해졌다. 나는 메일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냐고 물어보았고 첫 문장에 너무 충격받았다. -이미 너의 모든 표현 방식이 부담스러웠어.


나는 택시를 타고 집에 오면서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정말 많은 감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빠가 한번 더 죽은 것 같은 상실감. 내 앞의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차갑게 다가왔다.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아무런 변화 없이 돌아가겠구나. 아빠가 죽고 H도 떠났다. 신체 일부가 잘린 것 같은 고통이 싸하게 가슴 한켠에서부터 퍼져와 몸이 미세하게 계속 떨렸다. 한편으로는 내가 끊지 못할 연이고 나에게도 행복 외의 스트레스가 있었음을 알았기에 상대 측에서 끊어준 게 후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H에게 연락을 하고 받고 반응을 보는 것은 어떨 때는 예상 범위를 넘는 행복을 줬지만 그만큼 예상 범위를 넘는 불안을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마음에 나는 S에게 바로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엉엉 울었다. 서울에 와서 아빠 생각에 운 건 일기를 쓰고 난 뒤 한 번 뿐이었는데 갑자기 그게 겹쳐지면서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서러워졌다. 아빠가 없는 서울에 H도 없다니 내가 발 디딜 곳이 한꺼번에 두 군데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때는 이것만 충격이었는데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S가 할 말이 있다며 얘기를 꺼냈다. 목요일 자정쯤 H한테 연락이 왔었다고 했다. 디엠으로. 나는 S가 처음에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아무리 꾸며내도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가 있지? 혼란스러웠다. 동생한테 연락을 할 일이 뭐가 있을까. S가 이어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날 밤 모르는 계정으로 메시지 요청이 왔고, 승낙하자 친구 H라며 나 모르게 얘기를 할 수 있냐고 물었다 했다. 그리고 20분째 답이 없다가 엄청 길게 메시지가 왔는데, 내가 충격받을까봐 내용은 보여줄 수 없지만 내가 걱정된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자기한테 연락할 때 답이 없으면 이모티콘을 여러 개 보내고, 카톡이 답 없으면 메일을 보내고, 만났을 때는 집에 가기 싫어했다는 상세한 예시를 들면서 많이 불안해 보인다고. 그래서 가족분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더 그래보인다며 자기는 지금 이걸 도와줄 상황이 안된다는 말을 했다. -고 했다. 일단 내용도 엄청 충격이었다. 왜 자꾸 병원에 가라고 했는지, 친구 사이에 나올 주제가 아니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됐다. H와의 관계 안에서 나는 불안했다. 내가 하는 만큼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티가 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는 편지를 받고 별 생각 없고, 영향을 잘 받지도 않는다고 말했으니까. 술을 엄청 먹고 자기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의식 상태가 되어야 나한테 엄청 영향을 받아서 회사에서 상사랑 싸우고, 그만둘 생각까지 하고, 가족이랑도 싸웠다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와 만나면 늘 이성적인 면이 두드러지고, 왜 그러냐고 하면 자긴 원래 그렇다는 말로 방어했으니까. 나는 그게 처음엔 의아했고 내가 H를 꼬이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확하게 봤는데 H가 방어한 거였다. 반댓말로.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그 말로 자신까지 속여가면서.


내 속성들이 자신을 자꾸 무너뜨리고 감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자기도 분출하고 살고 싶고 편해지고 싶은데 자긴 그러면 안되는 사람이고, 나는 그래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니까. 그래서 내 표현 방식이 부담스럽다고 느끼면서도 나한테 정작 그러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고 나와 관계를 끊지도 않았을 것이다. (H의 내면 사고를 추측하는 건 자제하기로 했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그냥 내 생각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태까지 했던 말 -자기는 불편하거나 화난 게 있으면 말을 한다, 원래 평온하고 조용한 성격이다. 애인 앞에서도 그렇다-과는 반대로 저렇게 부담스럽다. 꾹 참았다.는 말들이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자기 스스로에게 외던 주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그걸 부정하고, 자기를 더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나같은 사람이 재밌으면서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과하게 행동한 건 맞지만 내가 꺼낸 주제가 H에게 꺼낼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맞지 않는 말이다. 그냥 자기가 나를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고, 그게 지금 힘들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동생한테 연락했다는 것은 처음에 이해가 엄청 어려웠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S도 놀랬겠지만 나도 엄청 놀랐다. 그걸 나한테 비밀로 해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정말로? 가족인데. 그 말을 오히려 나한테 했으면 충격을 받았긴 했겠지만 납득되는 이별이 되지 않았을까. 왜 굳이 인스타도 하지 않는 사람이 동생 계정을 찾아내서 연락하고 그렇게 긴 말들로 나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행동을 했어야 했을까. 내가 정말 걱정된다면, 나한테 직접 연락을 취하던지 나에게 대화를 시도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거리적으로도 자기가 훨씬 더 가깝고, 당장 행동을 취한다면 자기가 더 빠르게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가족한테 연락을 했지? 도대체 나를 뭘로 생각한 걸까. 나는 H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결론 쪽으로 자꾸 기울었다. 우리가 여태까지 한 게 연애와 더 가깝지 않았나? 나는 혼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단순히 데이트 명소를 찾아서 놀았다는 것만 근거이진 않다. 만나면 항상 H가 나를 배려하고, 자기의 원래 모습-감정적이고, 휩쓸리는-과는 반대인 모습이 강해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를 통제하려 하고, 나의 그런 면을 가지고 자기가 대신 무언가를 해주면서 만남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논리적인 근거를 대면서 선택을 하는. 근데 그 선택은 늘 자기 의견보다는 내 의견이 반영된. 모범 답변을 주면 내가 좀 더 노력하겠다는 예전 대화들. 나도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던 최근의 대화들. 친구 사이라고 해도 노력을 한쪽만 일방적으로 하진 않는다. 그렇게 치면 나도 혼자 죽도록 노력했다. 읽히는 감정들을 읽지 않으려고. H의 반대말을 진실이라 믿으려고.


끝으로 내 동생에게 자기가 감당하고 있던 나에 대한 어떤 책임을 굳이 전달했다는 것이 나를 친구로 생각한 것보다 뭔가 챙겨줘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나 하는 의심을 확신으로 만드는 큰 근거였다. M도, J도, S도 똑같은 말을 했다. 이런 사람은 처음 본다고. 내가 아무리 걱정되어도 그 말을 본인 말고 심지어 부모님도 아닌 동생한테 연락할 생각을 하는 게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지 않은가. 내 유년시절을 함께하고 장례식장에 왔던 M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내가 불안해 보인다는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장례식에서의 모습도 보지 못한 H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나는 투사로 느껴진다. 자기가 그만큼 힘들고 불안한데 그걸 내 모습에 씌워서 생각한 것 같다. 나는 물론 아빠가 죽고 나서 힘들고 불안하지만 H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지는 않다. 그냥 딱 그만큼 힘들고 지친 것 뿐이다.


H의 자리가 비고 나니 나에게 H가 어떤 모양이었는지가 보인다. 나는 아빠를 그리워했다. 아빠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서 유효하게 있길 바랬다. 그래서 H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내가 하는 것 만큼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집착하듯 매달렸다. 관계를 유지하길 바랬다. 생각해보면 H랑 대화가 잘 통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통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걸 지우고 나는 우리가 소울메이트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H가 필요하고 H에겐 내가 필요하다고 계속 되뇌었다. 아빠는 내가 대학을 가고 나서부터 연락이 잘 안됐고 그가 자리를 비운 만큼 나는 아빠같은 존재가 필요했으니까. H는 나에게 아빠같은 사람이 되어주었다. 칠칠맞은 나를 챙기고, 산만한 나를 통제하고, 감정적인 나를 눌러주고, 길을 잃은 나에게 길을 제시해주었다. 나는 H에게 감정적인 지지를 주고, 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느낌으로 점철된 색깔있는 세상으로 이끌었다. H는 아마 그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자신이 속해선 안 될 세계로 자신을 자꾸 인도하는 내가 무섭고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가 지켜야 하고 유지해야 하는 것들을 위해서는 자신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사람과 환경이 절실한데,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H한텐 내가 매력적이면서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 H가 필요했던 이유도. -TJ유형이랑 잘 맞는다면서 맞지 않는 부분들을 제외하고 합리화하려고 했던 내 어떤 부분도 그게 논리적으로 맞아야 내가 계속 아빠 없이도 아빠같은 존재를 곁에 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H가 떠나고 나서야 아빠가 나에게 얼만큼 필요했고 그리워했던 존재였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처음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왜 자꾸 내가 아빠 앞의 딸의 모습이 되는지. H는 또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줬는지..

알겠다.


토요일엔 J의 집으로 가서 자도 되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알겠다고 해서 J가 있는 Y시로 갔다. J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나잇값 못한다. 선을 넘는다. 술을 마셔야 속얘기를 하는 사람은 별로다.회피형 같다..는 내가 애써 묻어왔던 말들이. 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내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당시에는 묻어둘 수 밖에 없는 맞는 지적이었다. 자신을 포장하고 방어적으로 구는 그의 모습에서 진실된 면을 봤으면서도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필요해서 잡아두었다. 이제 나는 그런 말은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향을 받지 않아. 감정 기복이 크게 없어. 내 큰 말과 행동에도 별 생각이 없다는 말들. 나는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표현방식을 가진 사람이고 그 말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지 감정적으로 무던한 게 아니다. 인간이라면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고 감정은 순간적이기 때문에 있다가도 사라지고 생기길 반복한다. 따라서 감정 기복은 있을 수 밖에 없다. 정도나 주기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따라서 H가 한 말들은 다 반댓말들이었다. 자신과 나를 속이기 위한.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생한테 연락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뭐 또 어떻게 보면 이렇게 연락한 걸 보고 나한테 모종의 책임감 같은 걸 느꼈나 추측해볼 수 있어서 의문이 좀 풀리긴 했지만 나도 동생한테 그런 얘기를 전해듣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다. 나는 위 형제가 없는 첫째고, 첫째로서의 자존심이 있는데 한참 어린 동생이 내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겼다. 내가 불안해 보인다는 말을 듣고 도와줘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어야 했으니까. 그것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그 정도로 정신적으로 불안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건 고마운 행동이 아니라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나는 이제야 아빠가 떠났다는 것을 실감한다. H로 채우려고 했었던 그 빈 공간은 그냥 빈 채로 남겨둬야 했다. 정확하게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에게 내가 집착하게 되는 이유도 알았으니 이젠 좀 더 현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돌아보면 나는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 외엔 오히려 연락을 피하고 약속을 먼저 잡지 않는 회피형에 가깝다. 오직 H에게만 불안형이었던 이유는 내가 그만큼. 그에게 반응과 연락과 감정을 바란 만큼 아빠를 그리워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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