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발췌

시간을 거슬러

by 서민재

2025-11-30-일요일

많이 괜찮아졌지만 아직도 얼얼하다. 마음을 정리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예전만큼 편안하게 느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게 아니니까.

또 이런 내 삶에 적응해야 하겠지. 누군가가 빠지고, 누군가가 생긴.


아이패드에 카톡을 복구하니 마지막 대화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최근 몇 개의 카톡을 다시 훑어보니 지치게 받아들일 만 하다 싶었다. H는 자기 자신조차 제어하는 걸 버거워했던 사람인데, 나를 통제해야 할 것 같게 만드는 내 행동들이(예상범위를 벗어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나도 스트레스였다. H의 연락을 기다리게 되는 것, 부재를 신경쓰는 것, 내가 그에게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존재하는지 가늠하는 것.. 모든 것이 나의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H와 있으면서 재미있고 마음이 편했지만 H가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어 할수록 내가 느꼈던 거리감과 머쓱함은 허상이 아닌 실재였다.

내 연락을 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

받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게 마음이 아프다. 내 딴에는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던 것들이 시도 자체만으로 그에게는 위협이나 무서움으로 변모했다는 것이.

동시에 흥미롭기도 하다.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받아들이는 건 완전히 다르니까. 이래서 회피하는 사람과는 길게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조차 들여다보지 않는데 어떻게 남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겠나.

지금은 그냥.

H가 나를 생각했으면.. 생각하면서 후회했으면 싶다가

마침내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서 나에게 사과를 했으면 어떨까 싶다가도

그냥.. 잘 지냈으면 좋겠다가도

나만큼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

나의 부재를 크게 느꼈으면 좋겠다.

술에 취해 나를 불러내거나 전화했으면 좋겠다.

날 그리워하고 내가 준 모든 물리적 실체를 가진 것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찌릿찌릿 고통스럽길 바란다.

나도 그만큼 아프니까.

-

그래도 이 모든 일이 결국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면 그건 이제 이해가 된다. 나는 진심으로 새로운 삶의 국면을 접할 준비가 되었다.


-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기에 후회는 없다.

후회는 그에게 있겠지 /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마음을 다 주었다.


2025-11-18-화요일

나는 H한테만 쩔쩔매게 되는 게 싫다

슬프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힘들고 이유를 모르겠고 공허하고 불안하다

또 여름의 그 답답함으로 돌아간 것 같다

편지를 읽었는지 내가 전화를 하자고 한 건 까먹었는지

너가 입시과정동안 한 노력과 도움들이 무슨 도움이었냐고 말한 게 사실 상처여서

그게 너무 슬프다

없는 시간동안 그를 너무 많이 생각하니 심장이 계속 죄어오는 것 같다

그냥.. 슬프다. 답은 왜 안하는거지?

이래서,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어서 나는 전화를 하자고 한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나는 비로소 깊은 숨을 마실 수 있을까?

H 앞에서, 언제쯤 편해질 수 있을까?

그의 말투보다 내용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가 가능은 한 걸까

나는 그냥 한번 더 보고 싶은 건데

H는 나를 안 보고 살아도 될 만큼 덜 간절하고

나는 간절하니까

그 차이를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틈이 쪼갈라져 아프다.


2025-11-17-월요일

(중략)

온 몸의 피가 다 마르는 것 같고,

조그만 진동이 계속되어 발끝까지 미세하게

떨려서 속이 울렁거리고,

긴장되는 것 같이 심장이 얕고 빠르게 뛴다

감각들이 뒷편으로 아스라히 멀어진다.

펜을 잡기도, 편하게 있기도 어렵다

토할 것 같다.


2025-11-03-월요일

잠이 오지 않아 두 시간을 누워있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였다.

새벽, 택시를 타고 고양이 밥을 챙겨주러 집에 갔다.

집에 가는 모든 길이 선연한 예전 기억이었다.

오색빛으로 물든 나뭇잎 따가운 아침햇살이 눈부셨다.

오늘 갔다면 어땠을까 아빠가 맑은 날씨를 좋아했을 텐데


말갛고 젊은 얼굴로 나를 보는지 그 너머를 보는지 모를 아빠의 얼굴을 보고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국화에 둘러싸인 얼굴이 어딘가 앳되어 보여 절로 눈물이 났다.

빈소는 미술용으로 꾸며놓은 촬영장 같았다.

우리 넷은 드라마에서만 보던 상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아빠에게 잘가라고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같은 태도로 대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어디서부터 꼬였던 걸까.


2025-11-17-월요일 이어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당신이 거기 있음을 당연하게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버겁고 부담이다.

사랑을 쏟던지, 아예 삭제해버리던지 두 가지 방법이 내가 누군가를 대할 때 취할 수 있는 태도인 것 같다.

정확히 이 문제가 심리학적으로 어떤 문제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서..

H에게 자꾸 가만히 놔두면 될 주제도 꺼내서 서로의 생각 차이를 확인하려 들게 된다.

그게 아직 너무 어렵다.

마음 편히 H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게 어려워서 계속 건드리고 말을 걸고 말을 걸었다가 입을 꾹 닫고 과하게 행동한다.

이런 내가... 미성숙하다는 것을 이제는 똑똑히 알겠다.

불안과 공포 의심과 집착으로 얼룩져 떨고 있는 심장이 어디까지 뒷걸음질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진동 속에서도 분명해진 것은

이제 이런 면도 H에게 솔직히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 오랜 시간동안 의미를 부여하고 살을 덧입히며

상대의 사랑을 못 본,

벽을 쌓고도 들리지, 보이지 않는다고 칭얼거리던 이는

바로 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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