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발췌

개인적이라서 보편적인

by 서민재

2026-01-20-화요일


근황


어제는 오랜만에 병원에 갔다왔다. 오랜만에 가는 거여서 귀찮았고 하필 H가 소개해준 병원이라 병원을 바꿀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냥 갔다. 병원을 바꿔서 괜찮은 의사를 찾고 그 의사에게 내 히스토리를 설명할 힘이 지금은 없다. 그럴 바엔 강을 건너서 먼 병원을 가는 것이 낫다.



Y와 느낌


M과는 친구가 된 지 15년이 되어 간다. 중학교 때 처음 봤으니까 벌써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인 지금 인생의 절반을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요새 답이 이상하게 건조하고 딱딱하다 생각했었다. 예상하던 일이 일어났다. 당분간 연락을 못한다고 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자신을 좀 돌봐야겠다고. 말투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을 때부터 굳이 거기다 대고 너 요즘 왜 그러냐 무슨 일 있냐는 식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 자체가 검열이자 평가일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나도 내 대답을 했다. 근데 딱 예상했던 순간에 당분간 연락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 답으로 왔다. 아빠에 대한 슬픔을 어떻게 이겨내냐는 물음에 정성스레 대답해주길래 내 느낌이 틀렸나? 했는데 동시에 말에 굵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내 느낌은 호들갑이 아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너무너무 정확했다. 그래도 놀랐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자신을 돌봐야겠다는 말로 마무리된 이야기는 내가 왜 아픈지 물어본 메시지에는 답이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순간 화가 났다. 왜 하필 지금이니? 넌 왜 하필 지금 아프고, 너딴엔 너의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메시지가 나에게는 왜 연락을 그만하자는 얘기로 들리니.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날 떠나고, 믿었던 친구가 날 끊어내고, 오랜 인연인 J마저 내 손을 놔버리니 나는 그냥 삐뚤어지고 싶었다. 이건 세상이 날 버리는 거라는 유치한 자의식이 순간 퉁 하고 부풀어올라 사춘기 소녀처럼 입이 삐쭉 나왔다. 내 느낌은 언제나 정확하구나. 과하게 읽지 않아도 될 것까지 다 읽어서 나는 피곤하고 불안한 거구나. 내 느낌을 믿어야겠다. 그리고 Y는 그냥 당분간 내 머리에서도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A에게 느끼는 서운함은 A때문에 아닌, 아빠를 잃은 슬픔에 더해진 상실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상황 설명을 과대하게 해석해서 생기는 감정이다. 지금의 나는 거절이나 거리두기를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안경을 끼고 있다.


몸이 어떻게 안 좋은지, 아니면 이건 그저 표면적 이유이고 사실 나에게 피로함을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소리없이 관계를 두절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말해주는 게 성숙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감당할 에너지가 없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H와 이별하고 나서 나는 너무 힘들다. 길거리에서도 눈물이 나고 괜찮다가도 엄청 힘들어지고 이걸 혼자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그래서 더 괴롭다. 결국은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솔직히 좀 짜증난다. 나라고 내 슬픔의 원인을 남에게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다. 그냥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안 들어줘도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얘기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말해주는 것은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이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나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려고 한다. 약을 먹고 병원을 갔다오고 씻고 카페에 가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고 드라마를 보고 수면제를 먹었다. 깨끗이 씻고 새로 산 바디크림을 발랐다. 설거지도 했고 빨래도 끝냈다.




-

이제 드디어 안정이 찾아온 것 같다. 아무하고도 연락하고 싶지 않고,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불안도 많이 줄었고, 그냥..

일단 오늘은 그냥 자도 될 것 같다.



-

H는 상대방이 어느 정도 거절 의사를 비췄는데도 계속 연락하거나 태연하게 말을 거는 내 행동이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나 자기합리화로 보인다고 했다. 맞다. 거절에 너무 상처받는 것도 상대에게 예의가 아니고, 딱 그 거절이 의미한 만큼만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싶다. 그건 나의 존재가 그에 의해 정의되는 게 아니라 나는 얼마든지 그 뒤로도 상대에게 허락하는 한 제안을 하거나 대화를 걸 수 있으며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의 몫임을 확인받고 나를 빨리 안정시키고 싶다. 몇 마디 거절에 상처를 크게 받고 되려 그 전과 다르게 상대를 대하면서 수동 공격을 하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내 행동이 ‘공격’임을 깨닫고 나서는 오히려 좀 과하게 괜찮은 척 하면서 그 거절로 인해 내가 상처를 조금이라도 받았다는 사실을 덮으려고 한다. 수동 공격과 부정 사이의 적당선을 찾아야겠다. 일단 상대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답은 명확하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


고독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

그 시간의 참 맛을 알고, 나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며 나를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중간중간 누구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관심이 필요해서라면 작업 계정을 통해 나를 홍보하거나 글을 쓰는 방법을 적극 활용하자.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나의 인정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정은 일시적이고 계속 변하며 객관적이지 못하다.


비로소 혼자일 준비가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