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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 Nov 04. 2024

아빠의 부재(不在)


2024년 10월 24일


여느 때처럼 내 일상은 똑같았다.


아침 알람소리에 일어나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에 몸을 맡기고

어떤 옷을 입을지 잠깐 고민하다 손에 잡힌 옷을 입고 기분 좋게 회사에 갔다.


회사에서도 똑같았다. 조금 바쁘긴 했어도 일을 해결하고, 좋아하는 사람들 얼굴을 보며

회사이야기도 하고, 사는이야기도 하며 시계의 시침이 6을 가리키길 기다렸다.


직장인들의 소원인 숫자 6에 시침이 도착했고 곧장 가방을 싸고 집으로 걸어갔다.

집에 걸어가는 길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검색창에 "이번주 강원도 날씨"를 검색했다.


이번주 주말을 한 달 전 추석에 계획한 가족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넷이 여행을 간 기억이 언제인지 흐릿했기에, 다른 가족들처럼 여행을 가고 싶어서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강원도로 숙소를 예약하고 꼬셨다.


엄마도, 동생에게도 내가 모든 여행경비와 계획을 다 세우겠다고, 힘들겠지만 시간을 내달라고

유혹을 했고, 흔쾌히 응해주었다.


나는 주말 동안 갈 가족여행 계획을 세우며 들뜬 발걸음으로 단숨에 집까지 도착했다.

집에서 강원도 여행 브이로그 등을 보다 씻으러 들어가려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돌아가셨다."

"네 내려갈게요"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부르고 엄마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그제야 내 머리에서 엄마가 말한 두 단어를 인지했다. 온몸이 떨렸다.

추워서 떨린 게 아니었다. 그냥 떨렸다.


지금도 내가 어떻게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KTX를 탔는지 모르겠다.

그저 자주 내려가던 KTX 안에서의 시간과 그때 KTX 안에서의 시간은 그것과는 달랐다.


엄마는 어떻게 하지?

동생은 괜찮은가?

난 뭘 해야 하지?

왜 돌아가셨지?


이런 생각을 수 만 번은 하며, 2시간은 지나갔겠다. 하고 시계를 봤더니 겨우 30분 지났다.

그렇게 부산역에 밤 11시 50분에 도착했다.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20살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내가 가끔 부산에 내려가면 부산역 출구에 항상

가족들이 있었다. 특히 추석에 내려왔을 때는 아빠혼자 마중을 나와 서있던 모습이 생생했다.


늘 아빠와 만나던 부산역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엄마와 동생이 보였다.


서울역을 가는 택시부터, KTX를 타고 내려오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엄마와 동생 앞에서는 안 울고 둘을 위로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둘의 눈빛과 

마주치고 무너졌다.


엄마와 밤을 새우며 아무 말도 안 했다.

가끔 정적을 깨는 울음소리만 났다.


그렇게 짧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그때부터 나는 아빠의 아들이 아닌 아빠의 상주로서의 역할이 시작됐다.


긴 장례절차들, 중간중간 정산해야 하는 것들, 어떤 유골함을 할지, 어떤 수의를 할지, 입관식은 언제 할지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등 모든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부산의 친구들, 먼 곳에서 달려와준 직장동료들, 전 직장 동료들, 지인들이

도착하는 그 순간순간 나는 현실임을 점점 더 받아들이게 됐다.


이 먼 길을 힘들게 와서 나를 위로해 주고 같이 울어주던 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과 

함께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님을 나에게 알아차리게 해 줬다.


그래서였는지, 현실을 알아차리는 순간순간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긴 장례식이 끝나고 운구차를 타고 아빠 사무실부터 동네 한 바퀴를 돌고 화장터에 갔다.

화장을 하고 유골함을 납골당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허무했다. 모든 것이 

분명 지금은 강원도에 있었어야 했는데..


아빠 정말 무뚝뚝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나에게는 무뚝뚝하지 않았다.

항상 따뜻했다. 


아빠는 할어버지에게 정말 많이 맞았던 걸로 알고 있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난 아빠에게 단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다.


초등학생 때까지 나는 아빠와 엄마랑 어디를 다녀오면 항상 차뒷자리에 앉아있다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자는 척을 했다. 내가 자는 척을 하고 있으면 말없이 아빠는 나를 안아서

침대에 눕혀주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그래서 자는 척을 했다.


20살이 넘어 처음으로 부모품을 떠나 인천으로 올라갔을 때 한 달이라는 긴 연수를 끝나고

버스를 타서 부산에 내려왔을 때 추운 겨울 노포동 버스터미널에서 아빠는 3시간이나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렸다. 그렇게 내가 버스에 내리니 나를 꼭 안아줬다.


내가 군대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 다 제쳐두고 훈련소 입소에 따라와서 엄마도, 동생도 밝게 웃으며 인사했는데

아빠만 끝까지 운동장에 나를 따라오며 인사할 때 내 모습을 보고 울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때 처음으로 아빠가 우는 모습을 봤다.


이렇듯 나는 좋은 기억밖에 없다. 

엄마가 주는 사랑과는 다른 아빠의 사랑은 나에게 늘 따뜻함과 든든함을 주었다.


그런 아빠가 이제 없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아빠에게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며 미래에 내가 자녀를 낳으면

감히 아빠가 나에게 준 사랑만큼 사랑을 줘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또 하루하루 더 행복하고 소중하게 후회 없이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가끔 이글을보며 내가 후회없이 행복하게 살고있는지 보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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