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떠난 사람이 주는 위로
비가 흩뿌리는 날에는 무시로 떠오르는 가슴 아픈 일이 있다. 5년 전에 오십을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난 사람이 있다.
막내아들이 여섯 살 무렵에 다섯 살 된 아들 하나를 둔 집이 이웃에 이사를 왔다. 우리 집은 1층이었고 아파트 놀이터가 가까이 있어 두 아이는 가끔 어울려 놀기 시작하더니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다 온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호떡을 내주었다. 하필 호떡이 하나뿐이서 반으로 나누어 둘에게 똑같은 크기로 주었는데 이웃집 아이는 무척 불만스러워하면서 먹지 않겠다고 하더니 동그란 호떡 하나를 다 달라고 했다. 순간 당황한 나는 속으로 은근히 화가 나는 것을 참고 더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아이는 호떡을 그대로 두고 제 집으로 가버렸다.
아마 나는 그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이 엄마를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했고 아이 엄마의 반응에 더 놀랐던 일도 기억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엄마는 자기 아들은 늘 온전한 것을 혼자 다 먹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행동을 잘 이해하며 그것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거였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정해진 규칙이나 보편적인 습관을 어려서부터 길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철저하게 갇혀 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무언가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아이를 키우는데 나와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떤 것이 아이를 위해 더 좋은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 셋을 둔 나는 타인을 배려하면서 사회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양육해야 한다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이웃집 아이는 이기적인 아이로 성장할 것으로 속단했다.
아이들이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그 후로도 이사를 해서 멀어졌지만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했을 무렵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아이의 엄마가 자궁근종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랜 투병 생활이 이어졌고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무렵에 병문안을 한번 다녀온 나는 또 다른 충격에 며칠 동안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병원에서 아픈 환자를 간병하고 있던 사람은 삼수까지 포기하고 엄마 곁을 지키는 그 아이였다. 건장하게 자란 아이는 통증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부종으로 무거워진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짜증을 부리면서 화를 내는 엄마에게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병시중을 들고 있었다.
얼마 후 아이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 몸살을 앓았다. 호떡 하나를 다 달라고 떼를 쓰던 그 아이는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자라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를 많이 담고 사는 너그러운 아이로 자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엄마의 한 없는 사랑을 가슴 가득 채워 든든한 버팀목을 세워두어 엄마가 떠나도 팍팍한 세상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을 글로 옮겨놓고야 힘든 마음을 풀었다.
어제 떠난 이에게
아카시아 하얀 자리 비우고
붉은 격정 덩굴장미 따라
초록이 짙푸른 날
힘없는 바람비로
가엾은 너는
어제 종일토록 작별을 고했다
아낌이 없던 너
오십을 다 채우지 못해서였나
많은 이들에게
버팀목이었고
네가 남긴 사랑에게
버팀목 세워주었으니
오십 년은 살아낼 만할 거야
오늘은 화창하게
내일은 기쁘고 가볍게
돌아가길 바란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