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정숙희 2

새천년국민학교 9번째 이야기

by 아지song

그날 체육시간은 4학년 1반과 2반이 함께 쓰는 합동수업이었다.
운동장에는 가을볕이 환하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어떤 아이들은 춥다고 카디건을 챙겨 입었고, 남자아이들은 덥다며 반팔 차림으로 뛰어다녔다.

남자아이들은 운동장 한가운데로 몰려가 공을 찼다.
먼지가 일었고, 호루라기 소리가 바람을 가르며 흩어졌다.
여자아이들은 조회대 옆 느티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아 있었다.
그늘은 얇았지만 시원했고, 운동장은 햇볕이 내리쬐고 지나치게 뜨거웠다.

여자아이들은 그늘 아래서 각자 자기 반을 응원하고 있었고, 정희숙은 운동장 가장자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체육시간인데도 그녀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었을 뿐, 분필 대신 출석부를 들고 있었고 그녀의 지휘봉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동안 그늘 아래의 아이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희숙이 2반 쪽으로 걸어가자 그제야 미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진짜 그때 너무 창피했어.”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미현이는 무릎을 세운 채 그 위에 턱을 얹고 있었다.

운동장 쪽을 보는 척했지만 얼굴 한쪽이 굳어 있었다.


“차라리 그냥 열 대 맞는 게 나았어.”
미현이가 말했다.


“애들 다 보는 앞에서 그렇게 서 있으라고 하고… 서로 때리라고 하고… 그건 좀 이상하잖아.”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아이들은 여전히 운동장만 보고 있었다. 누구도 미현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다들 듣고 있었다.


“그래도.”

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또렷했다.

“너네 선생님이 너무 착했으면, 숙제 계속 안 해왔을걸.”

미현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지아는 운동장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옆반 선생님은 너무 착해서 애들이 숙제 거의 안 해 온대. 말로만 하니까. 그러니까 누가 문제인 거야. 누가 무섭게 잡아야 되는 거야.”

지아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지아의 말을 듣는 순간, 은수는 엄마를 때리던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네가 자꾸 맞을 짓을 하잖아.'

아빠의 말과 지아의 말은 다른데, 왜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지 은수는 알 수 없었다.


혼자 고개를 아주 작게 흔들고 있을 때, 미현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뭐라고?”

미현이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붙잡고 작게 되물었다.

“나는 그때 숙제를 했어. 그냥 아침에 잊어버리고 온 거야. 너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니.”

지아가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그래, 깜빡깜빡 잊어버리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정신이 안 차려져?”

미현이는 대답하지 않고 땅만 쳐다본 채 운동장의 모래를 손끝으로 파내고 있었다.
그날 뺨을 맞은 아이들 중, 남자아이들을 빼면 여자아이 들은 미현이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그늘 아래가 잠깐 조용해졌다.
운동장에서는 남자아이들이 “패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공 하나가 높이 떠올랐다고 다시 바닥에 떨어진다.


소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릎을 모으고 앉아 가만히 있던 소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모르겠어.”

소리는 낮게 말했다.

“정숙희 선생님, 나한테는 친절하게 잘해주시던데.”

그 말은 이상할 만큼 조용하게 떨어졌다.

“내가 책을 안 가져온 날에도 그냥 웃고 넘기셨어. 평소에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 아닐까?”

소리는 누구를 편드는 것도 아니고 자랑을 하려는 것도 아닌 사실을 말했다. 얼굴 표정은 잔잔하고 평온했다.

“내가 질문하면 설명도 해주시고…”

그 뒤를 더 붙이지 않았다.

그늘 아래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아이들은 모두 그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소리에게 친절했다. 선생님처럼.

미현이도. 지아도. 은수도.


미현이는 점점 더 표정이 없어졌고, 그저 땅에 드리운 그림자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아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운동장 위의 햇빛이 너무 밝아서, 나무 그늘에서 쳐다보면 가끔은 눈이 부셨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가장 바깥쪽에 앉아 있던 은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숙제를 안 해 오는 아이들 뺨을 때리지 않아.”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미현이가 은수 쪽을 봤다.
소리도, 지아도, 다른 아이들도.

은수는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운동장 쪽을 보고 있었다. 누구의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숙제를 안 한 애들이 누군지 먼저 보는 것 같아.”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벌이 정해져.”

소리는 은수가 말을 이렇게 길게 하는 걸 처음 보았다.


바람이 불어 느티나무 잎을 흔들었다.
잎들은 하나하나 흔들렸지만, 유독 가지 끝의 나뭇잎 하나가 더 크게 흔들렸다.

멀리서 공 차는 소리가 둔하게 들렸다.
은수는 거기서 말을 끊고 땅바닥에 손끝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무엇을 가장 창피해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국어, 영어, 수학처럼 나누듯,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나누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늘 아래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운동장에는 여전히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공 하나를 따라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몰려다녔다. 정희숙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러나 느티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은 여자아이들은 모두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구는 공을 보았고, 누구는 햇빛을 보았고, 누구는 제 발끝만 보았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어디에 앉아야 할지, 어디서 뛰어야 할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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