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by 포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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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연초록이 번질 때면 농부의 가슴은 먼저 마른다.

찔레꽃이 피면 비 대신 가뭄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묵은 가지 끝에서 힘겹게 밀어 올린 여린 순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가슴은 오그라든다.

그래도 그 시절의 자연은 달래고 기다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가 지나면 어김없이 장마가 왔다.

냇물을 채우고 수로를 돌려 물을 대던 분주한 계절.

고단했지만 질서는 있었다.

비는 두려움이 아니라 순환이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 장마의 얼굴이 달라졌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한밤중 몇 시간 만에

한 달 치 비를 퍼붓고 사라진다. 잠들기 전까지 멀쩡하던 밭이

아침이면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다.

날이 밝아 밭에 섰을 때,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밭의 경계도 밭고랑도 보이지 않았다.

물은 빠졌지만, 흙도 함께 쓸려가고 없었다.

밤새 물길을 타고 밀려온 돌덩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먹만 한 것, 얼굴만 한 것,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돌들이 밭을 메우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돌이 굴러 발목이 휘청거렸다.

삽을 꽂아 보았지만, 삽날은 흙이 아니라 돌에 부딪혀

딱딱한 소리를 냈다.

포도나무의 뿌리는 햇볕에 드러나 축 늘어져 있고,

떠내려온 잡초와 흙더미가 주인의 진입조차 막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침수는 단순히 물에 잠기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나무의 코를 막는 일이다.

땅속에서도 숨을 쉬어야 하는 뿌리가 진흙 속에서

질식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나의 가슴도 조여왔다. 나무가 숨을 쉬지 못하면

나 또한 숨을 쉴 수 없었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울 시간도 없었다.

허리를 숙였다.

진흙을 걷어내고, 줄기에 감긴 풀을 풀어내고,

돌을 하나씩 골라냈다. 하루라도 빨리 뿌리의 숨구멍을

열어주어야 했다. 손톱이 깨지고

허리통증이 몰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삽으로는 안 되는 돌은 두 손으로 옮겼다.

숨이 차오르면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다시 허리를 굽혔다.


며칠이 지나자 기적처럼 잎들이 다시 힘을 냈다.

흙탕물을 뒤집어썼던 밭이

점차 본래의 모양을 되찾기 시작했다.

몇몇은 끝내 시들어 가슴에 묻었지만,

대부분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잎사귀를 어루만졌다.

“살아나 줘서 고맙다.”

거친 입술이 파르르 한 잎에 닿았다.

그것은 농부의 애정이라기보다, 같은 숨을 나누는 존재들 사이의

확인에 가까웠다.


이제 농촌에서 ‘낭만’이라는 단어는 힘을 잃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울리면 농부는 잠을 잊는다.

장마는 계절이 아니라 경보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밭으로 나간다.

코가 막힌 나무의 숨을 틔워주던 그날의 비지땀을 기억하며.


비는 또 올 것이다.

이제 나의 호흡은 땅속의 뿌리들과 함께 들숨과 날숨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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