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얼음 위의 첫 자국
내 유년의 놀이터는 포도밭이었다.
아버지는 나무를 깎아 필요한 것을 만들어냈고,
나는 그 손놀림을 지켜보며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나무를 베어다가 썰매를 만들었다.
빙판 위에 올려놓고 밀었을 때
썰매는 생각보다 멀리, 매끄럽게 나아갔다.
그 순간 알았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솜씨가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내 손을 믿기 시작했다.
2장. 비뚤어진 것을 맞추는 법
17살, 졸업식이 끝나자 포장마차를 꾸미고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연탄가스와 찬바람에 시달리며 쓴잔을 마셨다.
계절이 바뀌자
금속가공 공장에서 심부름을 시작했다.
프레스와 선반, 용접을 배우며
쇠를 다듬는 법을 몸으로 익혔다.
18살, 양복점에서는
“바느질보다 체형을 먼저 읽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정상체형은 없다는 것을.
기술하나를 터득하는데 잣대로 백대는 맞은 것 같다.
군대에서는 자동차 정비를 배웠다.
시동이 걸리지 않던 엔진을 뜯어고쳤을 때,
선임의 표정이 달라졌다.
엔진이 살아난 것보다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때, 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을 몰고 다닐 때
졸음의 공격이 그렇게 거센 줄 몰랐다.
인정을 받기까지
내 몸에 새겨진 기술들은 피와 땀, 눈물과 모욕, 그리고
폭력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3장. 사람을 수리하다
건설회사에서 하자 담당을 맡았을 때,
나는 집보다 사람을 더 많이 고쳤다.
입주 초기,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베란다 문이 열리며 나를 불러댔다.
"아저씨, 커피 마시러 오세요"
출근길에 커피 다섯 잔을 얻어 마신 날도 있었다.
하자 접수보다
쏟아지는 하소연이 더 많았다.
이혼을 고민하는 부인에게는
감정이 아닌 선택지를 정리해 주었다.
덮고 갈 것인지, 책임을 묻고 갈 것인지.
어느 길이든 비용이 따른다는 사실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자신의 미모 때문에 납치가 걱정된다는
뚱보 아줌마가 경비실을 자기 집 앞으로
옮겨달라는 집요한 요청에 시달려야 하는
시간도 있었다.
변기가 막힌 것이 불량시공이라고 우기는
젊은 부부는 심한 욕설까지 퍼부었다.
난 망치를 들고 그 집을 찾아갔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시공불량이면 당장
새것으로 바꿔줄 것이고 사용불량이면
깨진 변기를 놓고 그냥 가겠다고 했다.
부부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동의했다.
내가 망치로 변기를 내리 쳤을 때,
아이의 지프차 장난감이 튀어나왔다.
난 그냥 돌아서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이 찾아왔다.
용서해 달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알았다. 이 사회가 쟁이라 불리는
기술자들에 얼마나 푸대접을 하고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나는 건물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불안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술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과장을 덜어내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4장. 흔적 없이 고치는 사람
불혹 이후, 호텔에서 일했다.
막힌 문을 열고, 가구를 고치고,
객실의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일이 내 몫이었다.
작은 카트 안에는 150개가 넘는 공구가 들어 있다.
나는 쓰고 나면 반드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공구들은 내 손가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기술자는 많다.
그러나 얼마나 빨리,
얼마나 흔적 없이 고쳐내느냐가 관건이다.
돈과 시간을 덜 들이고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만드는 것.
그게 내가 지향한 방식이었다.
현장을 꿰뚫어 쓴 시방서 한 장이
베테랑 업자들의 장난을 멈추게 할 때,
나는 소리 내어 자랑하지 않았다.
해결은 조용할수록 완성도가 높았다.
5장. 보이지 않는 밥그릇
젊은 시절, 기술은 고되고 서러웠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몸에 새긴 기술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집이 흔들릴 때
나를 지탱한 것은 간판이 아니라 손이었다.
어쩌다 보니 사람들은 나를
‘맥가이버’라 불렀다.
무엇이든 고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배운 것은 고치는 법이 아니라
흔적 없이 수습하는 법이었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흙을 만지고
누군가의 고장 난 하루를 고친다.
해결사의 인생은 여전히 수리 중이다.
그리고 그 수리는
눈에 띄지 않을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