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119구급차 안에서 휴대전화가 멈췄다.
그날 이후 벨은 울리지 않았다.
휴대전화 속 700개의 이름.
나는 그것을 성실하게 살아온 증거라 여겼다.
남들처럼 바쁘게 살았고,
남들처럼 관계를 넓혔고,
그 숫자가 나를 설명해 줄 거라 믿었다.
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 빠르게 잦아들었다.
병실은 조용했고
이메일 함은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섭섭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나는 포도밭에 서 있었다.
값이 떨어진 샤인머스캣 앞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톱을 들고 있었다.
언젠가 애정을 말했고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했던 나무였다.
하지만 계산이 달라지자
마음도 달라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를 떠난 사람들을 향해
차갑다고 말할 자격이
내게 없다는 것을.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쓸모를 따지고
상황을 계산하고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700개의 번호가 사라졌듯
나 역시 누군가의 목록 속에서
지워질 수 있는 이름 하나였다.
나는 특별하지 않았다.
위대한 일을 한 적도 없고
몸을 던져 누군가를 지킨 적도 없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바쁘게 살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하늘을 보고 떳떳하려면
나무를 봐도 그래야 한다는
당연한 말을
그제야 알았다.
나는 톱을 내려놓았다.
나무를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척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글은 대단한 고백이 아니다.
그저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그 부류의 하나가
잠시 멈춰 서서
양심의 가책을 적어본 기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