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왔네

by 포도향기
image.png

저녁 무렵,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난다.

나는 TV 소리를 조금 줄인다.

“아빠, 나 왔어.”

“어, 왔냐.”

그 짧은 사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 하나가

스친다.


또 왔네.

딸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고

냉장고 문을 연다.

컵에 물을 따르며

이 집의 공기를 아무렇지 않게 들이마신다.


나는 괜히 등을 곧게 편다.

이 집이 아직 내 집이라는

표시라도 하듯이.

사위와 다툰 이야기,

직장에서 힘들었던 일,

아이들 학원비가 올랐다는 말.

말이 길어질수록

나는 고개만 끄덕인다.

“아빠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잠시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켜져 있지도 않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연다.

정답은 없고

아버지라는 자리만 남는다.

해결해 줄 힘은 예전 같지 않은데

모른 척하기에는

아직 어깨가 남아 있다.


딸이 돌아가고 나면

집은 금세 조용해진다.

나는 한동안

현관 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거실로 돌아온다.


소파 한쪽이

조금 꺼져 있다.

괜히 손으로 눌러보지만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다.

싱크대 위에

딸이 쓰다 만 컵이 있다.

물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둔다.

베란다에 서서

불 꺼진 골목을 내려다본다.

반가움과

홀가분함이

한동안 가슴 안에서

서로 밀치고 선다.


딸은 친정을 고향이라 부른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기둥이 된 기분이 든다.

기둥은 말이 없다.

서 있을 뿐이다.

속이 조금씩 비어가도

밖에서는 잘 모른다.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순간

아주 작은 소리가 또 울린다.

또 왔네.

나는 안다. 다음에도

이 문을 제일 먼저 여는 사람은

나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말의 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