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온 간호사

by 포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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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세상은 침대 양옆에 묶인

내 두 손목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몸 위에는 얇은 패드 한 장이 덮여 있을 뿐이었다.

중환자실이라는 곳이 원래 그런 곳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의식은 늘 안갯속을 헤맸다.

기계가 내 숨을 대신 세어주는 기이한 적막 속에서

나는 보름 가까이 박제된 채 누워 있었다.

그 혼돈의 한복판에서 믿기지 않는

얼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를 하며

마누라 노릇까지 하던 친구, 미희였다.

그녀는 하얀 간호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곁을 지나던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려서부터 너, 나 좋아했지?”

어제 헤어진 동창을 길에서 만난 듯한 말투였다.

나는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짐승처럼 묶인 이 손을 제발

풀어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가만히 있어.”

그녀는 짧게 말하고 돌아섰다.


가끔 내 곁을 지날 때마다 힐끗 나를 훑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패드를 들추고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간호사라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하필이면 이런 꼴로 너를 만나다니.


나는 몽롱한 정신을 붙들고 계속 말을 걸었다.

함께 걷던 등굣길 이야기, 어린 시절의 기억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풀어달라는 말을 할 때마다

내 손목의 끈을 더 단단히 조이고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옛날의 너는 안 그랬잖아.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내 기억 속 그녀는 이미

오래전 캐나다로 떠나 살고 있었다.

언제 한국에 돌아와 간호사가 된 걸까.

의문이 스쳤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월이 한 바퀴 돌아 기적처럼

재회한 것이라 믿었을 뿐이다.


어느 순간에는 그녀의 가족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그 집 마루에서 보던 얼굴들이

병실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그것을 현실이라 믿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진실은 일반병실로 옮겨진 뒤에야 드러났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마자

나는 간호사들에게 그녀를 찾았다.

“미희 간호사 어디 갔습니까?”

환자의 첫사랑이 이 병원에 근무한다는 말에

간호사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라고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우리 병원에는 미희라는 간호사가 없습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그 모든 일이

‘섬망’이라는 괴물이 기억의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망했다.

하지만 곧 안도했다.

내가 알던 그녀가 그렇게 차가울 리는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놓이게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내 뇌가 수많은 기억 중

하필 그녀를 불러내

이토록 생생한 연극을 꾸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타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을 그녀가

지금도 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였는지도 모른다.


묶인 손목의 통증보다 더 선명했던 그 재회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내 무의식이 건넨

조금은 지독하고도

애틋한 처방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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