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티셔츠

삼각형 사랑

by 포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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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끔 그 장면이 눈앞을 스친다.

빛바랜 흑백 필름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번지던 붉은 기억 하나.

1978년 여름,

마흔 명의 전우가 살을 맞대고 살던

내무반의 이야기다.

그곳에 내가 유독 아끼던 두 후배,

강춘복과 최도영이 있었다.


평화롭던 내무반에 파문이 인 건

춘복 앞으로 온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발신인은 문희숙.

춘복은 세상을 다 얻은 듯

그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 내렸지만,

곁에서 그 이름을 본

도영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 갔다.


문희숙.

그녀는 입대 전

도영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여자였다.

육십만 군인이 넘쳐나던 시절,

왜 하필 그녀의 두 남자가

같은 부대, 같은 내무반에서

마주치게 되었을까.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그날 이후 도영은 밤마다

철조망을 넘어 나가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말없이 타들어 가던

그의 담배 연기는

비명보다 깊은 고통처럼 보였다.

결국, 도영은

내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얼마 후

그녀가 면회를 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춘복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비밀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고심 끝에

세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잔인한 일인 줄 알면서도

“멀리 서라도 그 얼굴 한 번만 보고 싶다”

라고 하던 도영의 말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면회 날,

그녀는 빨간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입대 전

도영이 그녀에게 건넸던

마지막 증표였다.

그 옷을 보는 순간

도영은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곁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춘복이 있었다.

도영은 뻗지 못한 손을

주머니 속에서 움켜쥐었다.

그날 밤,

나는 두 녀석에게 외박을 내어주었다.

부대 앞 낡은 여관방.

신문지 위에 소주 몇 병이 놓였고

세 사람은 마주 앉았다.

원래 둘이 앉았어야 할 자리에

한 사람이 더 끼어든 셈이었다.

말은 거의 오가지 않았다고 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고

누구도 눈을 오래 마주치지 못했다.

대신 술잔만 오갔다.

춘복은 묻지 못한 것을 삼켰고,

그녀는 지우지 못한 마음을 삼켰으며,

도영은 꺼내지 못한 말을 삼켰다.

그렇게 셋은

같은 자리에 앉아

서로 다른 밤을 건너고 있었다.


나는 부대에 남아

그들의 밤을 상상했다.

술자리는

눈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했다.

도영의 표정도

어느 정도는 그려졌다.

하지만

두 남자 사이에 앉아 있던

빨간 티셔츠의 그녀.

그녀의 표정만큼은

끝내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림은

오직 하나뿐이다.

두 남자 사이에 앉아

붉게 빛나던 빨간 티셔츠의 그녀.

그리고

끝내 진심을 말하지 못한 채

술잔 뒤로 숨어 버린 청춘,

도영이.

사랑한 죄밖에 없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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