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죽었다.
나의 본가는 2층짜리 주택이다. 은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파란 지붕을 가진 집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길고양이들이 자기 집인 듯 바닥에 몸을 잔뜩 비비고 있다. 재작년 겨울, 임신한 어미 고양이가 우리 집 앞을 서성였다. 집 고양이들은 새로운 고양이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문을 응시했다. 뚱뚱하게 부푼 배를 달고 가냘프게 우는 그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사료를 한 번, 두 번, 세 번.. 새끼 고양이를 낳고, 입양을 보내고, 중성화를 하기도 전에 또다시 임신을 했다. 다시 사료를 한 번, 두 번, 세 번... 첫 번째 임신과 달리 두 번째 임신의 새끼 고양이들은 건강하지 못했다. 꼬물거리며 사료를 먹기 위해 애썼지만, 다리가 하나 없이 태어나거나 유독 힘이 없는 새끼도 있었다.
땅이 지글거릴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상자 안에서는 썩은 냄새가 났다. 새끼 고양이 한 마리는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죽었나 봐.. 중얼거림도 잠시, 의심이 확신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독 힘이 없던 고양이가 소리도 없이 죽었다. 그다음은 삼색 털을 가진 고양이가, 그다음은 다리가 하나 없는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들은 하나 둘 죽어갔고, 힘이 쭉 빠진 작은 몸을 들어 치우는 일도 늘었다. 4마리 중 한 마리의 새끼가 남았을 때, 길고양이는 원래 이런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그 자그마한 것들이 눈도 제대로 떠보지 못하고 죽은 게 오히려 다행인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양이보다는 쥐새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고 축 쳐진 몸을 바라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리나 늙으나 죽음은 왜 이리 슬픈 걸까.
마지막으로 남은 새끼는 노란 고양이었다. 작은 눈과 작은 귀와 작은 몸으로 살기 위해 젖을 먹고 움직이는 듯했다. 사람을 무서워했지만, 우리 집 마당에서 뛰어놀기는 좋아했다. 이따금 창문으로 마당을 보고 있으면 작은 몸을 띄우며 점프하며 놀았다. 들어오는 햇빛에 몸을 기대 누워있기도 했다. 귀여워. 보다 보면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대전에 가면 우리 집에 있는 고양이를 못 보는 것도 슬펐지만, 가끔 마당에 오는 고양이들도 보지 못한다는 것도 날 슬프게 했다. 교감을 해보지도 못한 짝사랑 수준의 애정이었지만,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마음, 언젠가는 혼자 접어야 하는 마음에 기대를 더하고 있었다.
타지에서 자취생활의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까, 겨우겨우 적응을 하며 혼자 사는 것이 즐겁고 회사 생활이 즐겁다고 세뇌를 걸던 2주 차였을 것이다.
‘고양이 죽었어’.
6마디가 담긴 문자메시지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취방에 오기 위한 버스를 타기 위해 고양이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할 때까지, 마당에 방울토마토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할 때까지, 분명 그 새끼 고양이는 건강했다. 너무 건강했다. 여전히 날 피했지만 멀리서 날 관찰하고 있었다.
‘왜?’.
나의 첫 답장은 물음이었다. 어떤 이유를 말해도 납득이 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유가 궁금했다.
‘모르겠어. 상자에 머리를 박고 죽어있네.’
어떻게 된 것일까. 내가 그 집에 있었다면, 평소와 같이 창문으로 마당을 바라보며 새끼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면, 이유를 알았더라면. 그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우리가 버린 피자끈을 가지고 신나게 놀던 새끼 고양이였다. 어미 고양이가 오면 반갑다고 울던 그런 평범한 고양이. 우리 집 화단이나 현관문 앞에 똥을 잔뜩 싸놓아 치우게 만들던 고양이. 침대에 혼자 누워 자꾸만 상자에 머리를 박고 죽은 고양이를 상상했다. 상자에 반쯤 가려진 작은 몸이 떠올랐다. 결국 4마리 중 4마리가 다 죽었구나. 아빠는 말했다. 고양이가 그만 죽으면 좋겠다고. 나도. 짧게 답장을 마친 채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까먹을 거야. 상자에 머리를 박고 죽은 새끼 고양이도, 그 모습을 상상하는 나도. 그 시간의 내 자리를 아쉬워하는 것도.
고양이가 죽었다. 우리 집 마당을 뛰놀던 새끼 고양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