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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Aug 16. 2024

안세영 선수와 에밀리 디킨슨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배드민턴 올림픽 챔피언 안세영 선수의 기자회견을 보고 에밀리 디킨슨이 쓴 시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그들은 나를 산문에 가두었다」 (“They shut me up in Prose”) (1862)입니다. 이 시를 읽기 전 작가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19세기 미국의 가장 뛰어난 시인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는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은 그녀 생전에는 무명작가였습니다. 총 1800여 편의 엄청난 양의 시를 썼지만 그녀 생전에 공개된 작품은 10 편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두 작가의 허락 없이 익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녀의 생을 이야기할 때 따라붙는 수식어가 별난, 괴팍한 (eccentric)입니다. 학교 다닌 7년을 제외하곤 늘 매세츠세츠 엠허스트 소재의 자택에서만 지내며 친구조차도 편지로만 소통하고 공개하지도 않을 시만 쓰며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사회의 통념을 벗어난 삶을 살다 간 시인이 남긴 시 「그들은 나를 산문에 가두었다」를 읽어 보겠습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산문에 가두었다 -

내가 어린 소녀였을 때

그들은 나를 벽장에 넣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조용히 있는 걸 좋아했으니 -     


조용히! 그들이 들여다보았더라면-    

볼 수 있었을 텐데 나의 뇌가 - 움직이는 걸 -

차라리 새를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가두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 우리에 -


그 자신 의지만 있으면  

별같이 손쉽게 올라가  

속박을 경멸하며 -

웃으니 - 나도 구속되지 않으리 -       


They shut me up in Prose –

As when a little Girl

They put me in the Closet –

Because they liked me "still" –     


Still! Could themself have peeped –

And seen my Brain – go round –

They might as wise have lodged a Bird

For Treason – in the Pound –     


Himself has but to will

And easy as a Star

Look down opon Captivity –

And laugh – No more have I –     


에밀리 디킨슨


시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시작 줄의 산문(prose)은 사람을 옭아매는 사회적 규칙이나 관습을 의미하는 메타포입니다. 시인은 산문을 따분하고 상상력을 옭아매는 글로 여겼습니다. 즉 산문은 벽장 (Prose/ Closet)이나 다름없다는 거죠. 그들은 (그의 아버지나 그 당시 사회의 꼰대들) 시인이 조용할 때 그녀를 제일 좋아합니다. 소녀(Girl)와 조용히(Still)가 라임으로 연결되어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마치 시인이 “ 니들이 내게 원하는 거 “조용한 소녀” (Still girl) 아닌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두 번째 연 시작의 “조용히”는 “나 보고 조용하라고?”로 들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들이(themself는 지금은 문법적으로 틀린 단어이지만 19세기에는 통용) 나의 뇌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could have peeped) 나의 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았을 텐데. 즉 나의 뇌를 볼 수 없으니 나의 뇌가 얼마나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모를 수밖에 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아버지를 비롯한 꼰대(boomer)들이 한심하다는 듯 이렇게 도발합니다. 새를 반역죄로 우리(파운드는 지붕이 없는 우리)에 가두어 보라지. 어떻게 되나? 라운드(round)와 파운드(pound) 완벽한 라임으로 연결시켜 에밀리는 자신의 뇌를 새와 비교하며 뇌도 새처럼 우리에 갇혔지만 뇌도 새처럼 움직임을 시사합니다.    

   

   마지막 연은 뇌와 새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새는 의지만 있으면 자신을 속박했던 울타리를 경멸하면서 하늘의 별처럼 쉽게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상상력의 힘이 있는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상상력을 가두려 하다니 한심한 꼰대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마지막 줄의 “더 이상 갖지 않는다” (No more have I) 다음에 생략된 단어는 구속 (Captivity)입니다. 이 연에서 별(star)과 나(I)를 라임의 위치에 놓아 “나”는 “별”임을 암시합니다.  즉 니들이 아무리 나를 벽장 안에 가두어 입 닥치고 조용히 살길 바라지만 나의 뇌는 결코 구속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나의 상상력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 밤하늘의 별처럼 빛 날 거라는 거죠.   

   


  지금부터 거의 200년 전의 미국.  여성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은 한마디로 “찍 소리 말고 조용히 살아라”입니다. 180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긴 미국 낭만주의 시대 최고의 시인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에밀리 디킨슨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억압이었을 겁니다. 미국 연방 하원의원까지 지낸 아버지와 늘 부딪치고 껄끄러운 관계를 가졌다고 알려진 에밀리 디킨슨. 그녀는 어느 날 아버지와 심하게 말다툼을 벌인 후 방에 들어와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며 이 시를 쓰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그녀가 사회와 관계를 끊고 공개하지도 않을 수많은 시를 써가며 평생을 독신으로 말년에는 스스로를 자신의 방에 감금하며 지낸 그녀의 행동을 사람들은 기이하다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칩거 속에 써 내려간 수많은 시는 그 당시 사회를 향해 에밀리 디킨슨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항거이자 절규가 아닌가 합니다.

  

   안세영 선수의 기자회견 발언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그녀의 주장을  단순한 컴플레인트(complaint)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당한 펜세이션(compensation)의 요구로 볼 것인가입니다. 결국 이는 결국 개인과 단체의 이해가 충돌할 때 야기되는 문제이며  징징대는 불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협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이고 정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수 개인의 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두 개의 속담이 생각납니다. 하나는 일본속담으로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이며 또 하나는 서양속담으로  “소리 내는 바퀴가 윤활유를 얻는다”(The squeaky wheel gets the grease)입니다.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전혀 상반된 시각의 속담으로 단체 중심의 일본식 사고방식과 개인 중심의 서양식 사고방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날 서양에서 여성들이 누리는 권리들은 200년 전부터 에밀리 디킨슨처럼 여성 억압문제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며 투쟁한 결과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튀어나온 말뚝을 먼저 쳐 모든 걸 동일하게 만들려는” 사고방식으로 결코 한 단체를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유도계의 전설 김재엽선수가 당시 유도 협회장의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다 “정을 맞은 후” 우리나라 유도계가 내리막길로 향하게 된 일을 상기해야 합니다.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인간의 투쟁으로 얻은 산물입니다. 안세영선수의 용기 있는 행동이 선수 자신은 물론 우리나라 스포츠를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에밀리 디킨슨이 시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언어의 예술가라면 안세영선수는 배드민턴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셔틀콕의 예술가입니다. 안세영선수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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