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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May 23. 2023

『천로역정』 : 나 홀로 떠나는 영적 구원의 길

켈빈주의와  퓨리턴 마인드

   17세기 영국의 역사는 청교도라 불리우는 개신교 세력과 가톨릭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역사입니다. 청교도는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운동 중 특히 프랑스의 신학자 캘빈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개신교도를 칭하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퓨리턴 (Puritan)이며 이는 정화시키다(purify)에서 나온 용어로 정화의 대상은 로마 가톨릭입니다. 퓨리턴들은 로마가톨릭의 의식 위주의 예배, 교회 내의 계급, 그리고 성직자들의 부패를 정화하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이 교회에 복종하여 선행을 계속하고 종교 의식을 계속 지킴으로 얻어진다는 가톨릭 교리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퓨리턴들이 따르는 캘빈주의의 핵심 교리는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구원은 믿는 자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최종 결재권자는 하나님으로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자연히 개혁파인 퓨리턴들과 이미 차지한 걸 지키려는 가톨릭과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이는 두 세력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양측 간의 내전으로 비화합니다. 처음은 크롬웰이 이끄는 청교도파가 승리를 하지만 결국 개혁파는 찰스 2 세를 따르는 왕정파이자 가톨릭파에 의해 패배를 합니다. 그리고 1660년에 이루어진 왕정복고. 왕정파는 영국식 가톨릭인 성공회를 국교로 선포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합니다. 2000 명의 개신교 목사들이 자신들의 교회로부터 쫓겨나고 300명의 목사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죠.  수많은 청교도들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 고국 영국을 떠나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한 시기도 바로 이 때였습니다.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지던 바로 이 시기 32세의 존 번얀은 개신교에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개신교 목사의 소명을 시작합니다. 신학교는 다닌 적도 없고 지역의 중학교에서 간단히 읽고 쓸 정도의 교육이 전부였던 번얀은 결혼 전에는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의 서문에서 자신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춤추고 욕하고 허락 없이 교회 종을 울리는 방탕한 생활을 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헐. 이게 방탕인가요?)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가난한 아낙네들 서너 명 정도가 방에 앉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엿듣게 되었고 이 경험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토로합니다.



    그들은 마치 기쁨이 그들로 하여금 말을 시키는 듯 했어요. 그들은 기쁨이 충만한 

    성경의 언어로 말을 했으며 그들의 말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했으며 그들은 

    마치 신세계를 찾은 듯 했어요.     



   개신교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순박한 영국 시골 처자들은  BTS의 노래를 듣고 그 기쁨을 공유해가던 K 팝 팬들 같습니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 듯 그 당시 영국은 개신교의 열풍이 불던 때였습니다. 번얀도 이렇게 신앙으로 인도 됩니다. 그는 가세가 기운 탓에 어렵게 생활을 했으며 혼수라곤 낡은 두 권의 종교서적만 들고 온 가난한 여자를 만나 결혼 했지만 신실한 믿음을 소유한 처의 권유로 캘빈주의를 따르는 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그의 영적 스승이 된 기포드 목사를 만나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의 본업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빵구난 주전자나 냄비를 때우고 고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동목사(travelling pastor)의 소명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한 영국에서 개신교 교리를 설교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시기였지만 번얀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 당시 목사가 되려면 정부의 인증을 받아야 했지만 개신교를 믿는 번얀이 성공회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받을 리 만무했습니다. 무허가 목사였던 번얀은 곧 체포된 후 거의 12 년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설교를 그만두고 영국 국교를 따르면 된다는 간단한 석방 조건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보통사람의 눈에는 납득하기 힘든 태도이지만 번얀에게는  자신이 지켜온 신앙과 자신의 존재이유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유와 가족보다는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을 선택합니다. 장기간 투옥생활을 했지만 번얀은 자신의 고통을 종교 소설 특히 퓨리턴 문학의 정수라고 불리우는『천로역정』으로 승화 시킵니다. 


    1678년 존 번얀의 퓨리턴 알레고리『천로역정』 제 1 부 (크리스천이 떠나는 천국의 길)가 출간되자마자 15년 간 거의 십만 부가 팔리는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그로부터 6 년 뒤  번얀은 『천로역정』 제 2 부 (그의 처와 가족들이 떠나는 구원의 길)를 집필하여 출판하였고 그 이후 1, 2 부를 합친 형태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나오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 크리스천 이야기의 인기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 지금까지 약 200 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책의 초판 발행이후 340년 동안 한 번도 절판이 된 적이 없었으며 지금까지 전 세계의 모든 개신교 크리스천에게 가장 사랑받는 픽션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닙니다  이 작품이 나오나마자 성공한 이유는 작품이 읽기가 쉽고 유머가 넘치며 각종 모험으로 가득찬 재미있는 이야기 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모든 역경을 이기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퓨리턴들의 영적 승리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17세기 늘 박해를 받았던 청교도들을 위한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천로역정』은 크리스천이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파괴의 도시에서 천상의 도시로 향하는 여행기 형식의 알레고리(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1 부만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죠. 먼저 시작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세상의 광야를 걷다가 어떤 장소에 다다랐는데 그 곳은 굴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더기 옷을 걸친 한 남자가 어떤 장소에 서있는 게 아닌가? 그의 얼굴은 

        자신의 집을 등지고 있었으며 그는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커다란 짐이 지워져 있었다. 나는 그를 주시했는데 그는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울기 시작했고 몸을 떨었다.  더 이상 자신을 

         주체할 수 없자  그는 한탄의 울음을 터뜨린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시작은 의심할 여지없이 번얀의 개인적 경험을 말해줍니다. 내레이터가 걸었던 광야는 번얀이 돌아다니며 설교를 했던 베드포드 일대이고 그러다 가게 된 굴은 저자가 갇힌 감옥이죠. 화자가 잠을 청해 꿈속에 나타난 인물은 크리스천이란 이름의 순례자이지만 사실 자신의 모습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있으며, 그리고 등에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짐을 지고 있습니다. 심한 곤경에 처한 듯이 보이는 그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곤경을 빠져나가고자 하나 그 길은 그리 녹녹치 않게 보입니다. 그 당시 번얀이 처한 상황이 떠오릅니다. 그는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찬양하며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이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 일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무려 12 년 간 차갑고 어두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요?” 하며 울부짖는 그의 처지가 공감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경을 모든 크리스천들이 처한 고난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주인공의 이름이 (그 당시) 모든 사람들 뜻하는 크리스천입니다. 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의    순례자가 걸었던 광야의 길은 아담과 이브가 천국에서 추방된 이후 걸어왔던 길이며 아브람함이 약속의 땅을 찾아 걸었던 그 길이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을 찾아 40년 간 돌아다녔던 바로 그 광야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던 그 길이며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나 타지의 돼지농장에서 고난을 겪었던 그 길입니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곧 이렇게 바뀝니다. “구원을 받기위해 어떻게 하나요?” 



   이러한 주인공의 고난은 크리스찬 세계관을 특히 캘빈주의에 입각한 퓨리턴 마인드를 반영합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이라는 견해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나? 이에 대해 캘빈은 인간이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답을 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도 불복종의 죄를 저지른 겁니다. 주인공이 등에 짊어지고 나오는 무거운 짐이 바로 이 원죄를 상징합니다. 원죄의 짓눌린 삶을 살아온 우리의 불쌍한 크리스천. 그러나 그에게는 다행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바로 성경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책을 읽는다고 죄에서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먼저 본인의 영적인 투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열망하는 그에게 나타난 복음전도자. 그는 저편에 위치한 좁은 문으로 갈 것을 권면합니다. 좁은 문은 인간의 죄를 사해줄 예수님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은 먼저 살던 곳에 대한 미련을 보여 소금기둥으로 변해버린 롯의 와이프처럼 되지 않기 위해 처 자식이 있는 도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좁은 문을 향해 홀로 떠납니다. (이를 미안하게 생각한 번얀은 이들을 2 부에서 구원해 줍니다) 힘의 원천을 빼앗기고 두 눈마저 뽑혀버린 후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했으나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싸우는 삼손처럼 전진합니다. 천상의 도시로 가는 길은 외로운 투쟁의 가시밭길이지만 그가 위험에 빠질 때 마다 그를 도와주는 세력도 있으며 그와 함께 어려운길을 동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 도움, 선의의 사람, 주석자, 충실, 희망, 양치기, 빛나는 자 (천사),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투쟁으로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미 누구를 구원하실지 이미 예정해 놓으신 하나님.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구원을 위한 영적 투쟁은 필요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순례자는 마침내 천상의 도시로 입성하지만 이는 사실 번얀이 감옥에 꾼 꿈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결국 구원은  교회에 복종을 하며 선행을 베풀고 또 끝없이 계속되는 종교의식과 아무 상관없이 개인과 하나님 간의 문제라는 점이 암시 됩니다. 



『천로역정』이 나온지 10년 후인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기나긴 싸움에 마지막 승자가 정해집니다. 바로 개신교세력입니다. 이들의 승리로 영국에 입헌군주제가 들어섰고 퓨리턴을 억압하는 법들이 폐지되었으며 무엇보다 서구에 개인주의, 민주주의의 가치가 확립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밀튼의 『실락원』이 하나님과 함께 살던 천국에서 추방되는 이야기라면『천로역정』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행복한 기억은 정말 잠시이며 찰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를 다시 회복하는 과정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며 외롭고 긴 개인적인 투쟁의 과정입니다. 산 너머 산이고 물 건너 또 물입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지만 방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을 버리고 나와 홀로 싸우는 순례자의 모습은 서구인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서구 개인주의의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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