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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May 03. 2023

『실낙원』 : 존 밀튼이 부르는 자유의 찬가

        마음은 마음이 소유한 장소, 그 스스로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고

        또 천국을 지옥으로도 만드나니.  (실낙원  Book 1)



  1658년 밀튼은 그의 나이 50세가 돼서야 젊어서부터 쓰고자 했던 서사시의 주제를 마침내 창세기의 실낙원으로 정하고 구두 집필(완성은 1667년)에 들어갑니다.  퓨리턴 혁명을 주도했던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한 해이며 밀튼이 속한 공화정파는 왕정파에 의해 하나 둘씩 체포되어 처형당한 시기입니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660년 도망 다니던 밀튼 역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퓨리턴 혁명 가담자에 대한 정치적 사면을 조건으로 왕으로 추대된 찰스 2세에 의해 면죄를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때이기도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시력마저 완전히 잃게 되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진 바로 그때입니다. 시인이 그토록 원했던 사상적 종교적 정치적 자유의 공화국 퓨리턴 유토피아는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나 밀튼에게 자유는 포기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이자 가치입니다.「왕과 관료의 재직조건」에서 쓴 밀튼의 말이 떠오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닮아 본래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정도로 바보는 없다. 그리고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복종이 아닌 명령을

       내리는 특권을 부여 받고 탄생했다.


밀튼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자유는 그 누구도 영국의 왕도 아니 하나님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특권임을 천명합니다. 비록 왕정파에 의해 자유를 빼앗겼지만 자유를 향한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실낙원』의 하이라이트 9 장의 시작을 읽어 보겠습니다.    


       불신, 반목, 배반의 종자 인간은 반항과 불복종을 택했죠. 이에 하나님께서는

       화가 나셨고 꾸짖었으며 심판을 내리셨죠.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 겁니다. 죄,

       죽음의 그림자, 고난 말입니다.   슬프죠.  네 이건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는  분노한 아킬레스, 격분한 투르누스, 화가 치민 넵튠의 이야기보다 더

       영웅적인 이야기입니다. 나는 천상의 뮤즈가 매일 밤 내 꿈에 찾아와서 이

       시를 쓰는 것을 도와주도록 간청합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노래가 되도록

       말입니다. 영웅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삼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비록

       선택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결과 이렇게 시작은 늦었지만 말입니다 .          (Book 9  6-26)  


시인은 오랜 시간 후에 마침내 선택한 이 주제는 비록 슬프지만 트로이 전쟁영웅을 그린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 혹은 로마건국 영웅을 노래한 버질의 『아네이드』 보다 더 영웅스러운 이야기라고 천명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인간이 태초부터 하나님께 부여받은 자유의 신성함과 소중함에 대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실낙원』은 자유를 노래합니다. 자유에 대한 찬가는 먼저 문체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자유로운 문체는 라임(예를 들어 shark week,  sorrow morrow, the Garden of Eden, 오빠 나빠 등 비슷한 발음으로 운을 맞추는 일)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라임은 시의 필수 형식이었지만 밀튼에게 라임은 야만시대의 발명품이며 결코 좋은 시의 진정한 장식품도 아니고 필요한 부속품도 아닙니다. 라임은 시의 자유를 구속시키고 제약하는 쇠사슬에 불과합니다. 목에 칼을 쓰고 발목에 족쇄를 채운 몸을 가진 사람을 보고 자유를 떠올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라임을 없애 시가 바람처럼 강물처럼 흐르는 자유를 선사합니다. 이제 그 시작을 읽어봅니다.



       인간 최초의 불복종, 그리고 그 과실

       금지된 나무의, 그 치명적인 맛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에덴 동산의 상실과 함께, 한 위대한 사람이

       우리를 다시 인도할 때까지  그 축복의 장소로  

       노래하라, 천상의 여신이여 (Book 1 1-6)


       OF Mans First Disobedience, and the Fruit

       Of that Forbidden Tree, whose mortal tast

       Brought Death into the World, and all our woe,

       With loss of Eden, till one greater Man

       Restore us, and regain the blissful Seat,

       Sing Heav'nly Muse, (Book 1 1-6)



시의 라인 형식도 시인의 자유를 향한 의지를 표현합니다. 실낙원의 라인을 보면 매 행을 마침표로 닫는 방식(end stopped)대신 마침표 없이 매 행 서로 연결되는 열린 방식(enjambment)을 택합니다. 이로 인해 시어의 의미는 제한되지 않고 확장됩니다. 서사시를 시작하는 첫 라인의 마지막 단어인 푸르트(fruit)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푸르트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산물이란 뜻이고 또 하나는 과일이란 뜻입니다. 밀튼이 택한 라인 형식은 이 두 가지 뜻이 모두 가능하게 만듭니다. 먼저 첫 라인(OF Mans First Disobedience, and the Fruit)을 독립된 구로 생각하면 이는 The Fruit of Mans First Disobedience란 뜻입니다. 이때 푸르트는 산물이며 그 뜻은 “인간 첫 번째 불복종의 산물”입니다. 이를 시의 제목인 실낙원과 연결하면 이 첫 줄은 에덴동산의 상실은 인간의 첫 번째 불복종의 산물(결과)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 시는 푸르트 다음에 마침표가 없는 오픈 형식이므로 이 시어는 다음 행과 연결이 가능합니다. 이 때 푸르트는 창세기에 언급된 금단의 열매(the fruit of that forbidden tree)가 됩니다. 이 두 행을 연결시키면 인간 최초의 불복종을 야기시킨 과일(원인)이란 뜻이 됩니다. 열린 라인 형식으로 푸르트가 원인과 결과의 상반된 의미가 모두 가능해진 겁니다. 총 일만  오백 라인의 시 전체를 이렇게 마침표 없이 서로 통하도록 연결시킨 의도는 분명합니다. 매 라인에서 만들어진 의미를 한정짓는 게 아니고 아래 위로 통하도록 자유를 허락하여 그 의미가 가진 가능성을 최대로 확장시키자는 겁니다. 독자는 매 행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부단히 노력해야 시어가 제공하는 자유의 파티를 즐길 수 있습니다. 마치 자유란 그냥 얻어지지 않는 거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말입니다.        

   


   이제 자유로운 문체에 담긴 실낙원의 영혼을 만나봅니다. 밀튼 학자들이 실낙원을 이야기 할 때 늘 언급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서사시의 시작에 위치한 아담과 이브의 “불복종”(disobedience)과 마지막에 위치한 이들의 “방랑”(wandering)이며 이 둘의 공통분모는 인류의 자유의지 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질투가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고 이로 인해 최고 권력을 탐하며 하나님께 반란을 시도했던 사탄의 “불복종”과는 질도 결도 차원도 다릅니다. 먼저 인간최초의 불복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배반한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배은망덕한 그는 내게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나는 그를 정의롭고 올바르게 만들었다

       유혹을 견디기에 충분할 정도로, 비록 타락할 자유를 주었지만

       그렇게 나는  창조하였다  모든  천상의 세력들과

       영들을, 누구는 견디고 누구는 타락하였다

       자유로이 견딘 자는 견디기로 선택한 것이며

       타락한 자는 타락기로 선택한 것이다.  

       . . . . . .  


       자유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그들이 충성심, 신앙심을, 그리고 사랑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내가 명령한 것만 수행한다면  

       그들이 선택권이 없다면 그들을 어떻게 칭찬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복종한다면 내가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의지와 이성(이성 또한 선택이지)이 소용없다면 가치도 없고

       둘 다 자유를 상실한다면   

       수동적이 된다면 필요에 의해 하라는 것 만 한다면  

       나를 자유의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Milton, Book III, 95-111)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물의 배반에 대한 창조주의 변명입니다. 인간 최초의 불복종의 이면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실낙원을 여는 아담과 이브의 배반은 밀튼이 부르는 저항의 노래이며 자유의 찬가입니다.

   

   이제 실낙원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방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과일을 따먹고 아담마저 불복종의 죄를 저지른 후 아담은 이브를 원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내가 그렇게 간청한대로 나와 함께만 있었다면

       오늘 이 불행한 아침에 그 이상한 "방랑"의 욕구( that strange

       / Desire of wandring)가 동했을 때   

       언제부터 그 습관에 사로잡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땐 행복했지 모든 걸 망쳐버리고

      수치스럽게 알몸으로 비참해진 지금과 다르게 말이지  (Book 9 1134-9)


그러자 이브는 아담의 비난을 이렇게 받아 칩니다.


       그것이 내가 "방랑"의 버릇 (will of wandering)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요?  

       그대가 내 옆에 있어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거예요.

       아님 그대 역시 그 곳에 있었다면  

       뱀의 사기를 알아채지 못했을 거예요

       그의 말을 들었다면 말이예요 (Book 9 1145-9)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두 번 반복되는 원더링(wandering)입니다. 원더는 방황과 방랑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둘 다 길을 정처없이 떠돈다는 의미이지만 방황은 부정적인 그러나 방랑은 낭만적이고 모험을 즐기는 긍정적인 뉘앙스가 강합니다. 이브의 원더링은 이리저리 헤매는 방황일까요 아니면 모험 요소가 깃든 방랑일까요? 그러나 어떤 의미이든 원더링은 자유를 시사하는 말입니다. 불복종은 결국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임을 다시 한 번 암시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도 창조주 하나님조차도 꺾을 수 없습니다.  

  


    이제 『실낙원』의 마지막입니다. 불복종의 대가로 낙원으로부터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 이 둘을 에덴의 동산 밖으로 인도하는 대천사 마이클은 슬퍼하는 인류 최초의 커플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이 낙원을 떠나기가 싫겠지만 그대들은 이곳보다 더 행복한 낙원을

       그대 안에 갖게 될 것이요. 그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 . . . .

       그러나 그들은 곧 눈물을 닦았습니다.

       세계는 그들의 앞에 있었고 그들은 안식처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가이드입니다.  

       둘은 손을 잡고 고독한 길을 걸어갑니다 (wandering steps).  

       (Book 12 585 – 649)



실낙원의 결말 슬프지만 그러나 비관적인 느낌은 아닙니다. 아담과 이브는 눈물을 흘렸지만 그들은 곧 눈물 거둡니다. 그들 앞에는 세상이 놓여있고 이 곳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고독하지만 혼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또 서로가 두 손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인 원더링(wandering)이 시사하듯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누리는 마음이 바로 대천사 마이클이 예언한 에덴동산보다 더 행복한 그대 안의 낙원(A Paradise within thee)입니다.  


   17세기 개인의 자유를 향한 밀튼의 외침은 미국 지식인들을 감명시켜 결국 미국을 영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미국의 독립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유럽 각국으로 민주주의의 뿌리가 내리는 씨앗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를 생각할 때 우리는 밀튼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밀튼은 진정한  자유의 투사( freedom fight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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