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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Apr 25. 2023

『실낙원』 : 존 밀튼의 저항 정신

『실낙원』(Paradise Lost)(1667)의 저자 존 밀튼은 논쟁 불가 비교불가 영국 최고의 시인입니다. 그를 영국 시(詩)계의 고트(Greatest of all time)로 등극시킨 시가 바로 『실낙원』입니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로 시작하여 버질의 『아이네이스』와  단테의 『신곡』으로 이어지는 서양 최고 서사시의 계보를 잇는 밀턴의『실낙원』.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미처 다 못 하신 이야기를 밀턴의 머리와 입을 빌려 구술케 했을 것이라는『실낙원』. 1667년 영국 런던에서 출간 이래 윌리엄 블레이크, 존 키츠, 메리 셀리, 퍼시 비시 셀리, 존 스타인벡, C S 루이스를 비롯 수없이 많은 영미 작가들뿐만 아니라 살바도르 달리나 조셉 하이든 같은 미술가나 음악가들에게까지 영감을 제공한『실낙원』. 이 위대한 서사시가 영국 런던에서 출간된 지 356년이 흐른 지금 존 밀튼은 이제 세인의 관심에 멀어졌지만 그의『실낙원』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우리가 인식을 못할 뿐 아직도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위키디피아에서 『실낙원』의 영향을 받은 대중 예술( Paradise Lost in Popular Culture)을 검색해 보시면 케이 팝 가수 가인이 부른 동명의 노래에서부터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뮤지컬 미술 등 너무나 광범위하고 많아서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러나『실낙원』은 예술적 문학적 정신적 유산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 개인의 자유를 선물한 정치적 유산까지 남긴 걸작입니다. 존 밀튼은 왕정의 독재에 맞서 평생 개인의 자유를 외치며 그가 믿는 공화정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지닌 시인입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그의 정치적 신념이 배어있는『실낙원』은 그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지식인들과 루이 16세 치하의 프랑스 지식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결국 미국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고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 후 세계 역사가 증명하듯이 일인 군주가 지배하는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부분의 나라에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민주주의가 서서히 자리를 잡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체제하의 개인의 자유도 어떻게 보면 일정부분 존 밀튼에게 빚을 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은 『실낙원』에 담긴 정치적인 의미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볼까 합니다. 먼저 밀튼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밀튼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가 태어난 17세기 초의 영국으로 가야 합니다.  거의 100년 전 종교개혁의 불길로 촉발된 가톨릭과 개신교의 피의 투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던 때입니다. 구교와 신교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운 영국 성공회까지 가세합니다. 이 싸움은 삼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지만 개신교인 퓨리턴은 절대적으로 불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이후 영국 왕이었던 제임스와 찰스 1세가 영국성공회의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이었던 탓에 영국 정부는 이웃 나라들과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격인 퓨리턴들에게는 엄청난 박해를 가했고 이들이  견지다 못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 (1630년) 였습니다. 

   

 


  이런 종교적 갈등의 시대를 배경으로 1608년 존 밀턴은 부유한 퓨리턴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밀턴은 퓨리턴 가정의 성장 배경 탓도 있겠지만 기질적으로도 순수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글자 그대로 저항자였으며 뼈 속까지 반항아였죠. 그의 이런 성격은 당시 최고의 교육기관인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 교육의 효용성에 대해서 비판을 했고 대학 측과 몇 차례 충돌을 일으키곤 대학을 중퇴했다 나중에 다시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라틴, 그리스어, 이태리어, 히브리어 등 10 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였던 밀턴은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신학적 지식을 섭렵하며 캠브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합니다. 이후 잠시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 길을 고민하기도 하였지만 정치와 타협하고 구교와 신교의 짬뽕인 당시 영국 국교는 자신의 프로테스탄트 기질과 개혁적 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믿음 하에 포기하고 시인이 되기로 합니다. 

  

    이후 그는 이태리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로 유학을 떠납니다. 유학 첫 해인 1638년 어느날 그는 피렌체의 갈릴레오 집을 방문합니다. 그 당시 74세였던 위대한 천문학자 갈릴레오는 눈이 먼 상태였고 가택 구금 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업적인 지동설을 주장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교황청으로부터 자신이 연구한 학문적 진리를 포기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타협하기를 거부했죠. 이로 인해 갈릴레오는 로마의 교황청에 감금 되어 있다가 교황의 명령에 따라 주거를 자택으로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피렌체의 자택으로 돌아온 상태였습니다. 밀턴은 이런 갈릴레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1644년 6 년 간의 이태리 유학생활을 마친 밀턴은 이제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1 세. 영국에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하게 변질된 성공회를 개혁하자는 퓨리턴 혁명이 시작되던 해였습니다. 밀턴은 돌아오자마자 퓨리턴 혁명에 신학적, 사상적으로 힘을 보탭니다. 그 마음속에는 교황청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싸운 위대한 천문학자인 갈릴레오가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이 유럽의 새로운 로마로 거듭나고 새로운 문화와 개혁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야 하며 이는 오직 성경에 기초한 말씀과 순수한 개인 영혼의 자유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언덕 위에 하나님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방해되는 걸림돌들은 모조리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 중 최대의 적은 당시 영국의 국왕이었던 찰스 1 세 였습니다. 그는 개신교 세력이 장악한 영국 의회와 늘 적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찰스 국왕은 개신교 신자를 왕비로 맞이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무시하고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공주출신인  앙리에타 마리와 결혼합니다. 영국 성공회의 신자인 찰스왕은 가톨릭에게는 관대했지만 개신교에는 무자비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의회권력을 무시하며 세금 인상에만 올인 합니다. 개신교입장에서 영국 국왕은 공공의 적 제 1 호나 다름 없었습니다. 영국의 왕권을 향한 밀턴의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됩니다.  

   

   밀턴은「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 (1644), 「이혼의 원칙과 규율」 (The 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 (1644), 「영국 국민을 위한 두 번째 변론」( The Second Defence of the People of England) (1654) 등 정치적 내용의 팸플릿을 통해  왕의 권력을 부정하고 정부기관의 언론에 대한 검열을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이혼할 권리까지 옹호하는 등 그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사상을 거침없이 토로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인습타파 사상은 17세기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운동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왕과 성공회의 입장에서 밀턴은 눈에 들어간 티끌 같이 성가신 존재가 아닐 수 없었지만 이미 많은 영국인들은 밀턴의 혁명적인 사상에 동조하여 그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찰스 1 세가 이끄는 가톨릭계의 왕정파와 프로테스탄트의 지지를 받는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파 간의 10 년에 걸친 내전 (1642-1651)이 시작되고 밀턴은 지체없이 공화정파에 가담하여 왕정파에 맞섭니다. 내전에 공화정파가 승리를 거두자 왕정파의 수장인 찰스 1세는 재판에 회부되고 반역죄로 참수 됩니다. 이후 밀턴은 자신의 신념대로 찰스 1 세의 참수를 옹호하는 글을 씁니다.  그러나 밀턴은 프로테스탄트계 리더인 크롬웰 사후 벌어진 2 차 내전 때 왕정파에 패배합니다. 그는 이제 도망자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러다 체포되어 투옥되고 재산마저 몰수 되지만 가까스로 사형만은 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시력마저 잃어버리게 되죠. 늘 승승장구 했던 밀턴의 처참하고도 완벽한 패배로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새로운 크리스천 왕국 건설의 꿈은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이때가 1660년 그의 나이 52세 되던 해였습니다.   

    

 

  장님이 된 밀턴. 그는 이제 외부세계와 단절한 채 스스로 칩거 생활에 들어갑니다. 이태리 유학시절에 만났던 가택 구금 상태의 눈먼 갈릴레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 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천재였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기득권 세력에 저항했고 결국 처참한 패배로 끝을 봅니다. 눈이 먼 것도 행동반경이 가택으로 제한 된 것까지 동일합니다. 그러나 밀턴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 형언할 수 없이 쓰리고 아팠던, 그리고 최고로 어두웠던 시기에 그가 젊었을 때부터 쓰고자 맘먹었던 서사시의 주제를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실낙원에 대한 이야기로 정하고 구두 집필에 들어갑니다. 장님이었던 그는 딸에게 자신의 시를 받아 적게 한 거죠. 단테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며 싸우다 반대파에 의해 부패의 죄를 뒤집어쓰고 고향 피렌체에서 쫓겨난 후 이리저리 유랑생활을 하며 집필했다는 르네상스시대 최고의 서사시 『신곡』이 생각납니다.

   

   『실낙원』은 창세기 1 장부터 3 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에 의한 천지창조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의 창조 그리고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낙원에서의 추방을 이야기하고 있죠. 이 창세기 이야기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내용은 간결하기 짝이 없습니다. 밀턴이 보기에 너무 빈칸이 많았던 겁니다. 밀턴은 이 간략하게 기술된 창세기의 스토리를 자신의 신학적, 인문학적 지식, 천재적인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총 10 권 (나중에 12 권으로 개작)으로 구성된 일 만 라인이 넘는 대 서사시로 재탄생 시킵니다. 


『실낙원』의 시작부분을 읽어 보겠습니다.  


인간 최초의 불복종, 그리고 금지된 나무의  

그 과일, 그 치명적인 맛은 

세상에 죽음을 그리고 에덴 동산의 상실과 함께 

우리의 모든 고통도 가져왔다, 한 위대한 사람이 

우리를 그 축복받은 장소로 다시 인도할 때까지   

노래하라, 천상의 여신이여 



『실낙원』을 여는 첫 구절이 말해주듯이 이 서사시는 불복종 때문에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불복종으로 낙원을 잃어버린 자는 인류 최초의 커플뿐만이 아닙니다. 『실낙원』의 또 한 명의 주역인 사탄도 낙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한때 가장 빛나는 자, 빛을 품은 자란 뜻의 루시퍼란 이름을 가진 원래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천사 중의 한 명으로 천상에서 잘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향해 루시퍼를 외면하고 예수님께 경배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그는 몹시 상심합니다. 상처받은 루시퍼는 하나님께 대항해 반란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그는 처참하게 패배하여 천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결국 사탄도 아담과 이브처럼 불복종의 죄를 범하여 자신의 낙원을 잃어버린 겁니다. 이 시를 집필할 당시의 존 밀튼도 같은 처지입니다. 그도 자신이 꿈꾸는 낙원을 건설하려 찰스 1 세 영국 왕과 싸웠고 패배하여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담과 이브, 사탄 그리고 밀튼을 엮는 키워드는 바로 불복종 그리고 낙원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불복종은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 정신을 의미합니다. 『실낙원』에 흐르고 있는 밀튼의 저항정신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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