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재개발공화국

뉴타운에서 도시재생까지 1

한국의 도시의 역사에는 달동네 혹은 판자촌으로 불리던 마을이 있었다. 판자촌은 1960~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던 이촌향도(離村向都) 시기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빈민들이 도시의 변두리 산비탈에 조성한 동네를 말한다.


판자촌은 소방도로, 상․하수도, 공원 등의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채 급조된 가난한 서민들의 집단 주거지역이었다. 서울시의 경우, 판자촌은 1961년의 경우, 전체 주택의 20%, 1970년에는 전체 주택의 32%를 차지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1980년대 중반 서울시 전체 인구의 13%가 판자촌에 거주하기도 했다.(서울시 인구는 1985년에 963만 명을 넘어섰다.)


서울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도시의 기능을 빠르게 회복해야 했다. 특히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해야 하기에 주택, 도로, 학교 등의 도시 인프라 건설의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이 압축성장으로 가야만 하는 압박이 대한민국을 재개발공화국이라는 영예로운 왕관을 씌우게 된다.


1960∼70년대에 형성된 판자촌은 1980년대 들어 개발압력이 커져서 1990년대 대대적으로 재개발사업이 시작된다. 도시재개발사업은 강제철거와 도시 빈민의 주거권 박탈이라는 수많은 부작용을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상계동올림픽(김동원 감독, 1988)'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폐해를 여과 없이 볼 수 있다.


부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판자촌 개발사업은 대도시의 주택난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식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주택난 해소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또한, 주거환경개선에 효과적이었다. 판자촌은 도로 등 기반시설의 없었고, 위생과 재해의 위험이 상존하는 동네였다. 더불어 건설경기의 활성화라는 효과도 있었다.



재개발사업으로 대규모의 판자촌들이 아파트 단지로 바뀐 뒤, 건설사들은 새로운 개발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건설사들과 주민들의 욕망이 결합해 태어난 것이 바로 뉴타운사업이었다. 뉴타운사업은 판자촌이 아닌 양호한 주거지역까지 확대하여 주택재개발사업을 벌이게 하였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취임하면서 강북을 강남처럼 대체하는 강북의 도시개발정책으로 등장한 것이 '뉴타운사업'이다. 중산층의 신규 아파트 수요를 상징하는 정치적 브랜드로서 '뉴타운'이 등장한 것이다.


뉴타운사업은 양호한 주거지역까지 정비구역을 지정하여 재개발구역을 과대 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뉴타운사업은 서민들의 주택이 철거되어 멸실되는 것은 물론, 중대형 위주의 아파트를 공급하여 낮은 원주민 재정착률, 주변의 전․월세가격 상승 등의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


2010년 서울시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은 재개발공화국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서울시는 은평뉴타운을시작으로 모두 34곳의 뉴타운사업지를 지정했다. 서울시에는 뉴타운사업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택재개발사업과 주택재건축사업의 정비구역도 많았다.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상 정비(예정)구역은 재개발 299개 구역, 재건축 319개 구역에 2,315.9ha에 달했다. 이는 서울시 주거지역 면적의 7.5%에 달하는 규모였다.

뉴타운사업의 빠른 추진은 전세 시장을 흔들어 서민들 불안하게 했다. 빠른 속도의 개발로 소형․저렴주택이 철거되자 전세값 폭등이 일어났다. 소형․저렴주택의 대규모 철거로 인하여 전세시장이 요동치자,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2007년 12월 추가적인 뉴타운사업지구 지정을 중단하고 재개발․뉴타운 사업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점검을 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정부는 2008년 9월과 11월 도심재개발 사업을 통한 주택공급사업의 확대를 위하여 뉴타운 지구를 2배로 확대하고 임대아파트․소형아파트 건설의무비율, 용적률 완화 등 각종 규제 완화를 발표했다. 이는 재건축․재개발사업을 통하여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발속도를 늦추려는 서울시와 오히려 빠르게 진행하자는 중앙정부 간의 엇박자로 2007년 전세대란의 교훈은 잊히고 동시다발적 전면철거, 과속개발이 다시 추진되었다. 결과는 2009년에 전세보증금이 2배로 뛰는 전세대란이 재현되었다. 뉴타운․재개발 사업장마다 각종 분쟁이 발생하고 때로는 전쟁터를 불사하는 격한 분쟁이 심화되었다. 이런 과속개발로 6명의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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