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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박정희

국가보훈처가 이승만 기념관을 추진하겠다는 기사를 읽었다. 박근혜 정부 때 박정희기념관 논란이 기억나서, 한국의 보수가 국부(이승만)와 경제성장의 영웅(박정희)으로 추앙하고 싶은 두 인물에 대한 내 사견을 정말 개인적으로 재정리해본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327016251504?input=1195m


이승만과 박정희, 두 전임 대통령의 최후는 비참했다.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미국 땅에서 쓸쓸하게 최후를 마쳤고, 박정희는 궁정동에서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최후를 마쳤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권력 욕심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국적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두 독재자의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뉜다.

<철인정치를 꿈꿨지만 독재자로 마감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조지 워싱턴, 드골, 아데나워, 벤 구리온은 자국의 건국과 재건의 영예로운 주체였다. 그러나 워싱턴, 드골, 아데나워, 벤 구리온은 명예를 얻었지만, 이승만은 오명만 뒤집어썼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난한 양반의 핏줄로 태어난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건국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등잔 밑을 보지 못한 정치 야맹증 노인이었다. 이승만의 정치는 무지와 간신배는 가려내지 못했던 무분별함으로 빛을 바라고 말았다. 

이승만은 북한의 김일성과 김구, 김규식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엔총회의 ‘조선반도의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라는 결의를 수용했다.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체질적인 거부감이 유엔총회의 결의를 수용하게 했던 것 같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에서 드러난 공산당의 비인간성과 이중성, 국가보다 당을 앞세우는 태도 등을 경계하여 조선 적화(赤化)의 방어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는 유엔감시아래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제적으로 주권을 인정받는 것이, 통일의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방안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그는 ‘모두를 잃느니 반만이라도 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48년 5월 10일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아래 북한의석 100석을 비워둔 상태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7월 17일 공포된 새 헌법에 따라 7월 20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은 재석의원 196명 중 180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때부터 12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한국 정치사의 굵직했던 사건들이 터져 나온다. 5.26 정치파동, 사사오입, 3.15 선거부정, 4.19 혁명 등. 이런 사건들을 거치면서 그는 ‘건국의 아버지’에서 독재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국민들의 미움을 받고 쫓겨나게 된다.

건국의 아버지였던 이승만은 왜 몰락의 길을 자초했을까? 

그의 정치철학에서 구한말과 일제식민지를 경험한 지식인의 한계를 보게 된다. 이씨왕조의 무능을 목격하고, 탄압을 받은 경험이 있던 그에게 의원내각제는 군주국가로 회귀하는 퇴보였다. 그는 의원내각제는 군주국에나 알맞은 제도로서 독재화의 길을 터주는 비민주적인 제도라고 생각하였다. 대통령중심제야말로 민중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진정한 제도라고 보았다.

이승만은 해방된 우리 민족의 자치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해방된 우리 민족이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노련한 민주주의 정치가가 선의의 강력한 통치를 베푸는 것이 민족과 국가의 발전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마도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꿈꾸지 않았을까?

자료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세분화된 행정자료를 참고하지 않고 “내무부장관은 공산당을 없애도록 하라.”, “농림부장관은 쌀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라.”, “재무부장관은 물가도 오르지 않도록 하라”라고 추상적이고 권위주의적 지시를 내리곤 했다. 꼭 군주가 신하에게 하명하는 식의 모습이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새로운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王座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승만의 공(功)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기틀을 잡았다는 점이다. 국제정치에 밝은 세계사적 혜안(慧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배에게 국정운영을 맡겨 국가의 체력을 소진하게 했고, 민족통일국가 수립보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힘을 쏟은 것은 명백한 과(過)가 아닐까?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의 아버지’의 자리에 복권되려면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을 개정해야 한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4.19 이념의 계승”이 또렷하게 적혀있다. 더군다나 "4.19 이념의 계승"을 헌법 전문에서 삭제할 수도 없다. 대한민국 헌정사의 정통성이 4.19 이념의 계승에 있는 한 이승만 박사는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평범한 초대 대통령으로 헌정사에 기록될 것이다.

잊지 못할 그때 그 사람, 카우보이 박정희 전임 대통령!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권을 움켜쥘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後光) 덕분이다. 왜, 1979년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에 죽은 독재자 박정희의 후광이 현실 정치의 힘으로 작용했을까? 박정희 향수는 과거를 통해 동시대를 비판하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사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만큼 일방적인 평가로 단정할 수 없다. 과연 박 대통령의 功은 무엇이며, 過는 무엇일까?

1961년 5월 16일부터 박정희라는 이름이 한국의 역사에 깊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는 출발부터 독재의 씨앗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로 장악한 권력이었기에, 쿠데타는 늘 본질적으로 힘에 의한 권력 장악이기에 민주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독재의 전야제였다. 장기집권의 씨앗이 감춰져 있던 권력이었지만, 국가경제의 부흥은 눈부셨다.

박정희는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자주 말했다. 그런 그였기에 지독하게 가난한 대한민국의 경제부흥에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보릿고개 때 농촌에서 고생했던 이야기, 농촌 시찰 때 초등학생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보면서 어렸을 때 공이 없어서 새끼줄을 둘둘 말아서 차고 놀던 이야기 등을 자주 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난에 대한 기억이 집권 초기부터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의 2대 통치철학과 국정운영 계획을 세우게 했다. 자료에 따르면 그의 1차 관심은 자립경제의 성취였고, 통일도 자립경제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소신을 가졌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수출입국(輸出立國)이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 형편에서 경제 자원과 재원은 수출을 통해서 얻을 수밖에 없다. 한강의 기적이 이룬 수출정책 드라이브를 강하게 건 이가 바로 박 대통령이었다. 사회주의 정권도 쉽게 하지 못했던 국가주도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1961년에 82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을 1980년 1,508달러로 늘렸다. 19년 만에 18.39배가 늘어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또한 1970년 10억 달러 수출, 7년 뒤 1977년 100억 달러 수출. 이 결과는 엄청난 성과였다.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가 되는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 그러나 우리는 불과 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듯 대한민국이 누리는 국부(國富)의 기초는 모두 그의 근대화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강한 통치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 대통령의 강한 통치력의 근본은 권력을 절대로 나누지 않고 독점하는 체제(분열통치 Divide and control)였다. 권력 독점을 위해 박 대통령의 통치기간 동안 관철된 권력원칙은 두 가지였다. 하나, 군주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주는 것이 더 안전하다. 둘, 인간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사랑을 쉽게 버리거나 배신하지만,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서 오래 유지된다. 


이 원칙에 따라 그는 두려움을 심어주는 통치를 했다. 권력 유지를 위해 동서고금의 예를 교과서 삼아 이를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강철 같은 신념의 소유자 인간 박정희도 1974년 육영수 여사의 피격, 1977년 아들 박지만의 육사입학 등으로 심한 외로움에 빠진다. 그의 허전함에는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의 기반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정권유지의 긴장감이 떨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 박정희는 술과 여자, 차지철로 대표되는 타락과 측근들의 아첨에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더욱 타락한 모습을 보인 채 국민들의 손으로 권좌에서 쫓겨나지 않았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민족에게 빈곤타파와 안보라는 선물을 주었다면, 인권유린과 민주주의의 실종이라는 몹쓸 짓도 했다. 분명 그의 입장에서는 ‘밥을 먹여준 공도 모르고’ 자기를 매도한다고 하겠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밥도 먹었으니 이제 보다 높은 인권, 자유, 삶의 권리’를 이야기한 것이다. 


박정희, 그는 권총과 채찍을 든 카우보이였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그의 리더십이 필요악이었다고 하더라도,  공(功)이 과(過)를 덮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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