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관하여
어릴 적, 죽음에 관한 고민에 빠지곤 했는데, 영원히 삶과 죽음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져 두려움에 잠을 설치곤 했다. 내 삶에 끝이라는 게 있어 언젠가는 모든 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모든 것이 반복되는 ‘영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기억한다. 훗날, 이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려 역으로 발생되는 두려움이라는 가설을 보기도 했다.
처음 죽음을 경험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외할아버지 장례식에서 3일 내내 온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외할아버지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개월 전쯤, 여름휴가로 놀러 간 강가에서. 텐트 안에 앉아 남은 고기를 권하시던 할아버지의 말씀에 배부르다며 굳이 사양한 그 마지막 대화가 무척이나 후회스러웠다. 평생… 다시는 할아버지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무섭고 슬펐다.
얼마 전 돌아가신 이순재 선생님께서는 병상에 누우시기 전까지 연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블랙 사바스의 오지 오스본께서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공연을 하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죽기 직전까지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며 삶에서 의미를 찾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이 존경스러운 한편,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죽음 뒤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와중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곧 사라질 ‘삶’을 위한 의미를 찾는다니…
우리의 삶에는 죽음보다는 죽음 이전의 삶에 더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기엔, 누군가는 죽음 자체에, 혹은 죽음 이후의 삶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봉창. 윤봉길. 안중근. 이한열. 전태일.
전부 나열하기에 너무나 많은 죽음들.
그토록 바랐던 독립. 민주화. 노동 인권.
그토록 바라지만, 정작 자신은 절대로 보지 못할 세상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게 가슴으로는 이해하려 해도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괴로웠다. 죽음이 두려워 비겁하게 도망치는 내 모습이 상상되기도 하여서.
‘나‘가 없는 세상.
즉, 내가 죽은 후의 세상이 타인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그들의 각오가 상상하기 힘들었다.
죽음이 두렵다.
죽음을 맞이하며, 찾아올 신체적 고통.
세상에 두고 가는 모든 사랑하는 것들 과의 이별.
다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사후에 대한 미지.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거지 같은 삶일지언정 죽는 것보단 낫다고… 세상 모든 이에게 제발 죽지만 말아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83일 - 어느 방사성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 책의 주인공 오우치 히사시, 시노히라 마사토 님은 83일간의 고통 속에 삶을 연명하다 돌아가셨다. 그들이 겪은 고통을 텍스트로만 봐도 내가 죽고 싶은 심정이다. 삶은 그 자체로 죽음보다 무조건 큰 의미를 지닌다는 내 신념이 흔들렸다. 차라리 83일 전에 사고 직후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더 행복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단, 하루라도 더 살아보려 온갖 치료와 약을 써서 삶을 부여잡지만, 또 누구든 그토록 소중한 삶을 스스로 내던지는 너무 다른 모습들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 괴로웠다.
정희 누나는 몇 해 전 자살을 했다.
작별 인사도 못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무력감도, 도대체 왜 그랬냐는 원망 섞인 의문도, 다시는 못 본다는 슬픔과 두려움도 나를 괴롭게 했다.
누나가 정성스럽게 적어줬던 고작 몇 kB짜리 인수인계 파일에는 데이터 크기로는 설명이 안 되는 누나의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얼마 전, 돌아가신 현우 형의 기타를 업어왔다. 생 전, 뵌 적이 없던 형이지만, 그분을 기억하는 수많은 분들과의 만남과 대화, 기억. 그리고, 형이 남겨두고 가신 물건들에는 여전히 형의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요즈음의 나는 ‘살아가는 이유’들 보다는 ‘죽기 싫은 이유’를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는 이유‘라 함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돈, 절절한 사랑 따위였다면.
‘죽기 싫은 이유’는 혹시나 모를 Radiohead의 내한. 내년에 있을 나의 밴드 공연. 삼겹살에 소주. 이번 달 보너스. 다음 주 준영이와의 약속. 기타, 보컬 레슨. 등등…
‘살아가는 이유’를 상실해도 죽고 싶지 않게, 내가 죽기 싫은 이유들을 잔뜩 만들고 있다.
길게 죽음에 대한 고민을 늘어보았지만 그 어떠한 결론도 낼 수 없었다. 죽어본 적이 없는데 죽음에 대해 고민해 봤자, 결론조차 낼 수 없는걸.
진부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삶’이다.
끝까지 하고 싶은 것을 놓지 않다가 맞이하는 죽음도.
스스로 맞이하는 죽음도.
예기치 못한 억울한 죽음도.
간신히 희미한 삶의 줄을 겨우 붙잡다 맞이한 죽음도.
모든 죽음은 두렵고, 알 수 없다.
그러니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밖에…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내 죽음 뒤에 남을 세상에 작게나마 따뜻함을 남기기 위해 내 ‘삶’에 의미를 얹는 것이 정답이겠거니 싶었다.
이순재 선생님의 작품들. 오지 오스본의 음악들. 나의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나라.
정희누나가 잔뜩 두고 간 따뜻한 기억들. 현우형이 주신 기타.
모두 내 삶에 따뜻한 의미로 남겨졌듯 말이다.
어느 날부터, 끝없이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영원’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천국이 있다면, 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한번 힘들지만 세상에 태어나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기대가 되기 시작한 후로는 영원한 반복이 오히려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