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말할 수 없었다 : 아들의 방종
첫아들이 어떻게 지내시냐고 전화가 왔다. 글을 좀 쓰려고 한다고 했더니, 우리 키우며 노심초사한 글도 쓰라고 했다. 나는 책 제목은 ‘그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로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오래 방황을 했냐.”라고 물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직접 듣고 싶었다. 아들은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고, 내 기질이 그랬고, 안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라고 했다. “기질 탓, 남 탓을 하기에는 데미지가 너무 컸다.”라고 말하며 서로 웃었다.
아들은 꾀가 많았다. 사탕을 절대 먹지 말라는 아빠의 명령이 있었다. 나는 ‘사탕 먹을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과자가 90원이면 가게 주인은 거스름 대신, 사탕을 주었다. 아이는 사탕을 밖에서 몰래 먹고 들어왔다.
아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에너지 넘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아이가 책상 위를 뛰어다녀서, 위험하니 꼭 주의시키라고 했다. 주의하라고 했는데도, 또 책상 위를 다녔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뛰어다닌 것이 아니라, 걸어 다녔어”라고 변명했다. 벌서고 있는데도, 선생님 뒤에서 학생들이 하는 율동을 따라 해서 모두가 웃었다고 했다. 또 길에서 친구랑 노는데, 가방에 흙이 묻을까 봐, 근처 오토바이에 걸어놓고 놀다 왔더니, 오토바이가 없어졌다고, 빈손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그 주인이 반으로 책가방을 들고 오셨다. 아이는 천방지축이었다.
2학년 때, 문방구 주인이 전화가 왔다. 아이가 지우개를 몰래 훔쳤다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아이에게 매를 대며 다그쳤다. 친구들끼리 누가 성공하냐 내기를 했는데, 자기가 해보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조그만 게, 영웅 심리로 도둑질을 하다니, 기가 찼다. 호되게 혼을 내었다. 그런 일은 더 없었다.
3학년 때에 옆 여자애 짝이 책상에 38선 선 그은 거를 아이가 넘어갔다고, 서로 다투다가 여자아이를 때렸다. 여자애 부모가 난리가 났다. 아이는 짝이 성질이 너무 못 땠다고 했지만, “때리는 건 무조건 네 잘못이다” 하고 혼을 내며 또 매를 대었다. 그러다가 나도 화가 너무 나서, “내가 너를 잘못 키운 탓이다” 하고, 나를 때렸다. 아이는 나를 말렸다.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아이를 붙잡고 울었다. 여자애 집에 가서, 같이 꿇어앉아 빌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많이 놀았지만, 공부도 잘하고 잘 넘어갔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국어는 거의 1등을 하고, 축구도 탑이고, 다른 과목도 상위권이었다. 우리 집 옥상에서, 친구들이랑 얼마나 농구를 했는지, 시멘트가 갈라질 정도로 힘이 넘쳤다.
아들은 모든 것에, 에너지가 많았다. 친구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고, 운동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 6학년 때 집에서 생일잔치를 하는데 친구들이 20명이나 왔다. 여자애들도 많이 왔다. 서로 아들이 멋있다고 난리가 났다. 인기도 많았다. 아이는 어디든지 튀었다. 아들은 영웅 심리, 과시욕, 인정욕구에 에너지도 넘쳤다.
고등학생이 되자, 이웃 학교에 여자친구가 생겼다. 여자친구 생일이라고, 수업을 빼먹고, 학교 운동장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렀다. 선생님과 여학생들이 창가로 와서 구경하고 난리가 나고, 결국 붙잡혀갔다. 화장실에서 서로 누가 높이 뛰어서, 위에 석고보드를 머리로 깨는가를 내기했다. 결국은 아들도 연루되어, 10명이 기물 파손으로 반성문을 쓰고, 수리해 주었다. 문제아였다.
여자 친구가 100일 되는 날 반 아이들에게, 축하로 100원씩을 받았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200일이 되는 날, 간이 크게도 아이들에게 2000원씩을 거두었다. 한 부모가 이것을 학교와 교육청에 투고했다. 선생님은 이것은 갈취라고 했다. 이리저리 막아 보았지만, 결국은 퇴학 처리가 된다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아들은 이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 것인지 몰랐다고 했다. 생각이 틀려먹은 아들이었다. 그래도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사정사정해서, 자퇴하고 유학 보낼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아이를 붙잡고, “너 죽고 나 죽자.”라고 울부짖었다.
어디든 다른 지역에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남편을 설득해서, 모든 식구가 호주로 갔다. 아들은 좀 더 자유로운 환경을 좋아했다. 불안한 나는 3년이나 같이 살았다. 그리고 대학을 가게 되었고, 돈도 떨어져서, 아이들만 두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동생이 “형이 집에 안 오고 있다.”라고 했다. 아이는 보내준 학비를 가지고 카지노를 갔다. 그리고 거기서 첫날에 수천만 원을 땄다. 따는 것이 문제였고, 곧장 나락이었다.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돈을 잃는 것은 한순간이고, 자명한 일이었다. 우리가 알게 되고, 돈이 다 떨어지자 잠적했다. 그때 나는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처음엔 그렇게 방종하고, 자신을 내팽개치는 아들이 너무 미웠다. 우리가 잘못되게 키운 것이 무엇인가 자책하고, 자책했다. 그러다가 아이는 아무 소식이 없고, 찾을 수도 없자, 너무 불안했다. 친구들도 소식이 없어 모른다고 했다. 혹시 장기까지 파는 거 아닌가, 아들을 영 잃는 것은 아닌가, 몇 달 동안 마음은 불안을 넘어, 미칠 것 같고, 죽을 것만 같았다. 날마다 아이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가슴이 새까맣게 탔다.
몇 달 후에, 아들이 몰래 한국에 들어와, 학원에서 알바를 하는 것을 한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데려와 붙들고, 화내고 울고, “왜 그러냐고?” 절규하며 몸부림을 쳤다. 아들은 바로 살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 버릇을 쉽게 고치지는 못했다. 정선 카지노에 가서, 도숙자가 될까 두려웠다. 아들은 포커 도박하는 하우스인가에 다녔다. 잡아 오면 또 전화가 와서 갔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이었다. 서울까지 가서 놀다가 뻔뻔하게 집에 올 차비가 없다고 했다. 내가 모른다 했더니, 무전 기차를 타고 오다가 경찰서에 잡혀있다고 연락이 왔다. 내치지도, 계속 뒤를 봐줄 수도 없는 지옥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아이가 친구들이랑 호주에 가서 일하겠다고 했다. ‘그래, 한국의 그런 부류의 환경을 끊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초청한 업체의 말과는 다르게, 포도나무 묘목을 심고, 캔을 눌러서 재활용하는 힘든 노동이었다. 돈을 조금 모으자, 그렇게 사지 말라는 싸구려 중고차를 샀다. 비가 오는 날, 자동차 바퀴가 미끌리며, 2미터 낭떠러지에 차가 떨어졌다. 아이는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뜬 채로 핸들을 꽉 잡았고, 차는 처박혔다.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엄마, 차 사고가 났는데 눈에서 뭔가 나오고, 눈이 안 보여”라고 했다. 몸이 후들거려서 설 수도 없었다. 차 유리에 부딪히며, 안경이 깨어져 눈에 들어간 것이었다. 다행히 뒤에 있던 친구들은 많이 다치지 않았다. 한적한 외국 시골길에 차도 없는데, 때마침 등교해 주는 학교 차가 신고해서 병원으로 갔다. 병원도 열악해서, 안과 전문의가 없었다. 외과 의사가 안경 유리가 자꾸 눈을 파고 들어가니, 급하게 안경 유리를 빼내었지만, 빨리 한국에 가서 정밀 검사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리는 아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길어진 수염에, 냄새나는 옷을 입고 나오는 아들은, 국제거지였다. 아들을 보니, 생명은 무사한 안도, 눈에 대한 불안이 교차했다. 아들을 안고 울었다. 그로부터 일 년간, 4번의 눈 수술이 이어졌다. 의사는 기적적으로 실명은 안 되었지만, 시력은 더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안경도 소용없고, 왼쪽 시력은 0.1이었다.
“네 생명을 살려 주었으니, 바로 살아라.”라고 했지만, 아들은 쉽게 도박을 끊지 못했다. 한탕에 빠져있었다. 돈이 떨어지면, 휴대폰을 만들어 되팔고, 사채금융에서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려서 탕진했다.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돈을 빌렸다. 친구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빌려주고, 아이가 갚지 못하면, 나에게 돈을 달라고 전화했다. 남편은 자식도 아니니 버려두라고 했지만, 우리까지 버리면, 정말 도숙자가 될 것 같았다. 사채금융의 이자는 눈덩이같이 불어났고, 하나를 갚으면, 또 다른 채무 독촉장이 끈질기게 날라 왔다. 그 모든 빚이 억 가까이 되었다. 다 청산해 주는데, 몇 년이 걸렸다.
아들에게 매일매일 장문의 문자를 보내었다. 하소연하다가, 애걸하다가, 화를 내었다가,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썼다. 아들에게 물었다. 그때 아빠 말처럼, 너를 자식이 아니라고 연을 끊어 버리면, 네가 도리어 더 빨리 깨닫고 돌아왔겠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아니, 엄마가 끝까지 나를 놓지 않았기에 돌아왔다.”라고 했다. 그렇게 아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포기했다. 자식이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성공은 안 해도 좋으니, 사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자식은 마음의 한이고 눈물이며 가슴앓이였고, 분노였다.
그러던 아들이 너무 착한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결혼하겠다고 했다. 정말 새롭게 살겠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정말 고맙다고 하며, 결혼을 시켰다. 학원을 차린 아들은 학위는 없어도, 정말 잘 가르쳤다. 한 2년 열심히 하더니, 주위에 더 큰 학원들이 생겨서, 학원이 점점 힘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더니, 또 꾐에 빠져서, 학원을 넘기고 서울로 가버렸다.
어느 날, 아들이 다시 도박하니, 어쩌면 좋겠냐고, 며느리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이 문제로 둘이 심히 싸웠고 아들은 집을 나갔다고 했다. 며느리는 집에 알리면 끝장이라는 협박에, 참다가 참다가, 어린 아들과 생활이 안 되니 전화를 한 것이었다. 빚이 또 왕창 있었다.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끝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들은 어딘가에서 또 방탕하게 살고 가끔 집에 왔단다. 나는 며느리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계속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어느 날 둘이 오더니, 결국은 이혼하겠다고 했다. 안된다고, 안된다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청천벽력은 몇 번이나 내 인생을 박살 낸단 말인가? 그들은 그렇게 이혼을 했다.
아들은 새 출발을 할 거라고 호주로 갔다. 며느리와 손자에게 오랫동안, 아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생활비를 보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못해 도려내는 듯 아프다. 다행히 며느리는 열심히 일하고, 손자는 잘 자라고 있다. 그래도 불쌍하다. 가끔 우리와 아빠를 만나 놀기도 했지만, 마음속엔 늘 눈물이 흘렀다.
아들은 여행사에 들어가 가이드 일을 했다. 이 일이 적성에 맞았고, 자기 일을 사람들이 인정해 주자, 서서히 도박을 끊었다. 나이도 들고, 철이 들기 시작했다. 영어도 능숙하고, 관광객에게 재미있는 예화와 역사 이야기를 잘하고, 인솔도 잘했다. 회사에서 탑이었다. 나는 여전히 장문의 문자를 보내곤 했다.
어느 날, 관광을 갔다 온 사람이, 아들이 보낸 선물이라며 들고 왔다. 그리고는 아들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너무 방황했는데, 엄마가 사람이 되도록 기다려 주어서 지금의 자기가 있다고 했단다. 정말 감동이었다고, 모두가 울었다고 했다. 경치보다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수십 년의 방황 뒤에, 아들이 돌아왔다.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아들이 관광 온 착한 아가씨와 사귀게 되었고, 결혼할 거라고 했다. 외국에서 결혼식을 했다. 정말 잘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아들은 그렇게 정상이 되었고, 여행사에서 인정을 받으며, 착실히 해서, 집도 사고 잘살고 있다.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혼의 흔적은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다.
아들은 만신창이가 되어도, 돌아갈 곳이 있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마지막 끈이었다고 한다. 그래 내 아들아, 돈을 쓸데없는 곳에 다 쓰고, 내 가슴이 문드러졌어도, 네가 바로 섰으니, 다 괜찮다, 다 괜찮고말고.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고 돌아와 주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