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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Apr 01. 2022

자발적 백수가 되었다(1)

2022년 1월 1일 자발적 백수가 되었다.


아파트 담보대출 상환이 아직 10년이나 남아 있고 보험료에 관리비, 통신비, 식비(안타깝게도 세 식구 모두 잘 먹고,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아이 학원비(피아노, 검도. 하나를 그만두면 어떨지 계속 꼬시고 있다) 등등 매달 돈 들어갈 일은 차고 넘친다. 이런 상황에서 돈 한 푼 못 버는 백수가 돼도 과연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까. 승자독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가 끝나도 이제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건가. 마흔 넘어 재취업이 가능하기나 할까. 영영 현장에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사직서를 내기 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들로 잠을 설쳤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백수가 되었다. 왜 이런 무모한 결정을 내렸는지, 앞으로 대책은 무엇인지 아직 아무것도 분명하게 답을 할 수 없다. 그래도 일단 15년 동안 적성에 맞지도 않는 '직장인'이라는 옷을 입고, 여기까지 달려온 나에게 가장 먼저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대학을 졸업한 2004년 2월을 시작으로 2021년 12월까지 (중간에 대학원을 다녔던 기간을 제외하고) 꼬박 15년을 직장인으로 살아왔다.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 조직이 정해준 업무와 틀에 맞춰,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며 살다 보니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어 버렸다. 이른 아침 자유로를 달려 서울에 있는 직장에 출근을 해, 8시간 노동을 한 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무한 반복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어쩐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은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았다. 일 년 넘게 수시로 찾아와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퇴근길 특별한 이유 없이 운전대를 잡고 울었다.


직장생활은 일단 패턴이 잡히면 매일 일정한 모양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무엇보다 지구력이 중요하다. 크고 작은 갈등과 시련에도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는 융통성과 인내심, 그리고 가끔은 '어쩌라고'의 정신도 필요하다. 일을 하다 보면 여러 사건사고가 예기치 않게 빵빵 터지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변수들이 생기지만, 큰 패턴 그러니까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노동하고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는' 순환에는 변화가 없다. 그 변함없는 순환을 깨지 않고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이 직장인들의 위대함인데, 그 꾸준함의 원천은 뭐니 뭐니 해도 월급이다. 월급은 그 어떤 더럽고 치사한 상황에서도 섣불리 깽판을 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제어장치다. 먹고사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가벼운 일이 아니기에. 일의 즐거움과 열정, 사명감도 먹고사는 문제보다 앞설 수 없다. 때문에 월급이 주는 안정된 상태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그럼에도 브레이크를 밟은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이대로 쭉 오십까지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여전히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에 미세먼지가 잔뜩 낀 것처럼 답답했다. 과연 무사히 정년퇴직을 하는 것이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인가. 다른 선택은 정녕 없는 것인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매일의 과업들을 정신없이 바쁘게 처리하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고 온 기분이었다.


물론 정년퇴직은 어려운 일이다. 요즘처럼 불안정 노동이 늘어나고, 퇴직 시기도 빨라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또 꾸준히 직장에 다니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 역시 애정을 갖고 일을 했고, 직장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성장했다. 나의 이십 대와 삼십 대를 돌아보면, 직장을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이어오는 중요한 인간관계 대부분이 직장에서 이루어졌고, 심지어 결혼도 직장동료와 했. 가치관이나 세계관, 정치적 성향, 인간관계, 가족, 육아, 우정, 사랑 등등등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많은 부분이 직장과 일(work),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았다. 철저히 직장 중심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죽이 잘 맞는 관계라도 시간이 지나면 맘에 들지 않는 면도 보이고, 실망스러운 점도 찾아내기 마련이다. 나와 직장의 관계도 그러했다. 만족하는 점이 있었지만, 불만인 점도 있고, 애정 하는 면이 있는 반면, 꼴 보기 싫은 면도 있었다. 언제나 완전히 좋거나, 완전히 싫은 건 없지 않을까. 나는 '최고의 직장', '신의 직장'이라는 말을 들어도 시큰둥하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고, 직장이니까.




나의 첫 직장은 외국계 반도체 회사였는데 반도체 칩을 고객사의 요청대로 조립(assembly)하고 테스트(test)하는 회사였다. 그곳에서 나는 해외 고객들의 주문과 요구사항을 내부에 전달하고, 내부에서 발생한 이슈들을 고객에 전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이십 대 사회초년생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꽤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해맑은 얼굴로 입사해 어느새 이마에 삼자 주름을 깊이 새기고 야반도주하듯 사라져 간 동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반도체 산업은 대체로 늘 호황이었기에 매일, 매 순간이 바쁘고 빠르게 돌아갔다. 조금이라도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면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았다. '못해 먹겠다!'며 아침마다 눈물바람으로 출근하던  3개월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나는 출근길을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인간은 결국 어떻게든 적응을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처리 능력은 점점 나아졌고, 실력도 조금씩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비바람을 함께 맞는 또래 친구들이 있었다. 어딜 가나 사람에게 치이고 상처받지만, 또 사람에게 위로받고 힘을 얻는다.


어느덧 나는 신입직원의 사수 역할을 하는 연차가 되었고, 이전보다는 여유를 갖고 일하게 됐지만 근본적인 회사 시스템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늘 쉽핑(shipping) 못한다고 지구가 무너지지 않아."라고 호기롭게 말할 때도 있었지만, 여전히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게 하기 위해서는 매번 누군가를 들들 볶고 쪼아야 했다. 점점 나도 누군가를 공격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조금이라도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핏대를 세우고 잘잘못과 이유를 따져 물었다. 가만히 있으면, 결국 내가 공격받는다고 생각했다. 분노와 후회가 수없이 번갈아 밀려오며 내면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물론 지금의 나라면 그때와는 조금 다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고 밀어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사람을 기계처럼 몰아붙이는 것이 얼마나 형편없는 짓인지 이십 대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나도 힘들고, 다른 사람힘들어지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그때 처음 브레이크를 밟았다. 입사 후 5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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