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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청구소송, 혼외자가 상속인이 되는 방법

강제인지 절차로 상속분가액반환청구 등 상속분 인정받기

by 오경수 변호사

‘인지(認知)’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아마 낯설게 느껴지는 분이 많을 텐데요. 사전적으로 ‘어떤 사실을 인정하여 앎’이란 뜻입니다. 오늘은 민법이 규정하는 인지에 관해 살펴볼까 하는데요. 민법상 인지는 바로 ‘혼인 외에 출생한 자녀에 대하여 친아버지나 친어머니가 자기 자식임을 확인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친어머니도 인지가 가능하긴 하나 인지는 대부분 아버지와 자식 사이 문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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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출산이라는 특별한 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굳이 다른 절차를 밟지 않아도 둘 사이 관계는 인정되죠. 어머니가 혼인을 했는지 여부는 둘 사이를 인정하는 데 별다른 영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릅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낳은 아이를 아버지가 자기 자녀로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지라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혼인하지 않은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법이 알아서 아버지를 정해주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임의인지와 강제인지(재판상 인지, 인지청구소송)인데요. 먼저 임의인지는 글자 그대로 아버지가 임의대로, 즉 자기 뜻에 따라 하는 인지를 가리킵니다. 비록 개인적인 사정때문에 혼인 신고는 못 했으나 자기 아이라는 사실은 인정받고 싶을 때 필요한 절차입니다. 임의인지는 신고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하는 '창설적' 신고입니다. 신고해야만 비로소 아버지와 자식으로 인정된다는 말입니다. 신고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자기 자식이 분명해도)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거죠. 인지 효력은 출생 시로 소급,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이와 달리 강제인지, 즉 재판상 인지는 부모 뜻과는 상관없이 법원의 재판이나 조정을 통해 인지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한 절차입니다. 모든 아버지가 혼외자를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는 건 아니죠. 때로 자식을 감추고 싶은 과거 정도로만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인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의식불명에 빠지거나 이미 사망했을 수도 있고요. 아버지가 인지를 거부하거나, 의식불명 등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경우 자식은 인지청구소송을 통해 아버지와 자식 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진우 씨는 어머니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생 얼굴 한 번 못 본 아버지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그날 밤 진우 씨는 어머니를 따라 지방에 있는 한 요양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노인이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우 씨는 온 몸이 마비된 듯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안 반대로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 채 진우 씨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집안 뜻에 따라 강제로 외국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진우 씨는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어머니 단둘이 지냈습니다.

진우 씨가 병원을 찾은 지 일주일만에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상주 완장도 달지 못한 채 조용히 장례를 치른 진우 씨는 늦게나마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겪었던 힘든 시간을 이제라도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역시 방법만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진우 씨는 전문가를 통해 인지청구소송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혼인외 출생자와 친아버지 사이에는 법률상 친자관계가 당연히 생기지는 않습니다. 둘 사이 친자관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지절차, 즉 임의인지나 인지청구소송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사례에서 아버지는 본인 뜻에 따라 인지를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강제인지가 필요한데요. 그렇다면 이 사례처럼 친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때에도 인지청구소송이 가능할까요.


민법과 가사소송법은 ‘생부가 그 출생자를 인지하지 않는 경우 그 출생자, 직계비속 또는 법정대리인은 생부가 살아 있는 때에는 생부를 상대로, 생부가 사망한 때에는 사망 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이내에 검사를 상대로 하여 생부의 사망 당시 최후주소지 관할 법원에 인지청구의 소를 제기’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친아버지가 이미 사망했어도 소송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다만 아버지가 사망한 때에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에 제한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망 사실을 안 날부터 2년 안에 반드시 인지청구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겁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친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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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안 날부터 2년이 지나기 전에 인지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아버지의 친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요. 그러나 문제는 진우 씨가 아버지 친자식이라는 사실에 관한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유전자 검사 결과일텐데요. 아버지 생전에 어떤 방식으로는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게 가장 좋았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소송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검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검사 대상자를 정하는 문제나 법원이 강제로 검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소요될 수 있으므로 아버지와의 유전자 검사를 미리 확보하지 못한 경우 소송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소송을 통해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 진우 씨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자식이었던 게 됩니다. 인지에는 소급효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재산을 남기고 사망했다면 당연히 상속인으로서 그 재산에 대한 일정한 권리도 생기게 됩니다. 다만 다른 상속인들이 이미 분할을 마친 상태라면 진우 씨는 자기 상속분에 해당하는 ‘가액반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피상속인이 사망한 다음 진행된 인지청구소송으로 상속인이 추가되는 경우 법률관계는 조금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기존 상속인들로서는 조금 억울한 일일 테고, 새로 상속인이 되는 혼외자는 자기 상속분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생길 겁니다. 어느 상황이든 꼭 전문가 도움을 받는 게 좋습니다. 특히 진우 씨처럼 평생 아버지 없이 자란 혼외자는 늦게나마 아버지 자식으로 인정받는 사실 자체도 매우 중요합니다. 부디 경험 많은 전문가 도움을 받아 자식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상속권을 놓치거나 손해 보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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