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새벽에 전기가 나갔는지 도시락을 싸려고 냉장고를 여니 안이 미지근하다.
빛이 필요해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찬장 위에 고정시키고 도시락을 싸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떨어졌다.
8년 가까이 이리저리 구르고 떨어져도 무쇠같이 멀쩡하던 휴대폰 액정에 금이 갔다.
이때까지도 터치가 됐다.
아이들이 아침 먹으러 부엌에 들어와 좀 더 밝게 해 줄 심산으로 이곳저곳 휴대폰을 세팅하다 역시 부엌 찬장 위가 제일 밝아 안정적으로, 카메라만 밖으로 빼꼼 나오게 두었는데 갑자기 잘 있던 휴대폰이 또 낙하했다.
이놈이 오늘 죽기로 작정했나 보다.
아니, 내가 떠나보내려 마음먹었던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몇 번이나 떨어졌는데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나라니…..
화면을 보니 데드픽셀이 선명하게, 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피아노 건반 같은 픽셀이 잔뜩이다.
죽었으나 살아있는, 좀비폰이 되었다.
나에게 폰은 결제 수단이자 기록(사진, 노트 등)장이며 소통의 수단이지만 요즘은 패드 사용이 더 잦다.
밖에 나가지 않으면 폰을 쓸 일이 거의 없는 데다 전화도 도통 오는 일이 없다.
그래서 그다지 아쉽지 않았는데 갑자기 사진첩의 사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귀차니즘 때문에 미뤄뒀던 백업과 여분의 용량을 구입하는 것에 주저했던 쫌생이 같던 지난날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이미 벌어진 일, 해결책을 찾으려 인터넷을 뒤진다.
그동안 휴대폰을 바꾸지 않았던 이유는 멀쩡하게 기능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게으름이었다.
할 일을 미루면 언젠가는 이렇게 크게 한방 먹는 일이 생기고야 만다.
애타게 애인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전기가 속히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운동 가려던 맘을 접고 전기를 만들어내는 자전거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집에서 자전거를 굴린다.
2025/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