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치러진 스탠포드 ALC 프로그램의 마지막 열흘, 나는 서울대, 일본 게이오대, 대만 국립대, 그리고 스탠포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프로그램에 지원할 때부터 나는 스탠포드에서 듣게 될 수업이나 한 달간의 미국생활보다도,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다른 학생들이 어떤 사람일지 제일 궁금했다. 그래서 난 최종 프로젝트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그들을 조금 더 알고자 했다.
설문조사의 개요는 이랬다. 먼저 그들에게 학업, 돈, 연애, 친구, 가족 등 10가지 항목에 대해서 순서대로 우선순위를 매기게 했다. 그리고 각각의 항목마다, 예를 들어 학업을 위해, 한 달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 상태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마지막에는 전반적으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지 물었다. 응답자들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매우 그렇다’에서 ‘매우 그렇지 않다’까지 5단계로 응답할 수 있었다.
설문조사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스탠포드 학생들은 대체로 ‘행복하다’고 대답했고, 10가지 우선순위 중 건강을 제외한 9가지에서 4개국 학생 중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반대로 아시아 학생들의 전반적인 행복도는 ‘보통’ 수준에 머물렀는데, 특히 서울대 학생들은 행복도가 가장 낮아 ‘불행하다’에 가까웠다. 게다가 서울대생들은 10가지 우선순위 중 8가지에서 가장 낮은 만족도를 보였다.
뚜렷이 대비되는 결과는 흥미로웠지만, 다른 참가자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스탠포드 학생들이 가장 행복하고, 서울대 학생들이 가장 불행하다고?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발표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들킨 것처럼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하면서 나는 이 결과가 지난 몇 년간 내가 느끼던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입시 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 행복할 것 같은 서울대생들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점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 제목처럼 높은 성적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우리가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 반면에 스탠포드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받으면서도 행복하다는데,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스탠포드와 서울대 친구들을 비교해 보았다.
함께 시간을 보낸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보니, 스탠포드 친구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내면의 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어찌나 자신에게 충실했던지, 메건은 남의 시선에 상관없이 달리는 버스에서 춤을 추었고, 마이클은 3년 동안 3번이나 전공을 바꿔가면서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으려 했다고 했다. 불현듯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탠포드 친구들이 행복한 건 남들보다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성적이 좋았던 것은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걸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따라온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서울대생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우린 좋은 학교에 가면 행복할 거라고 믿으며,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만 했을 뿐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건 잠시 미뤄놓았던 것 같다. 그렇게 입시라는 사다리의 꼭대기인 서울대에 입학해 잠시 성취감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했기 때문에 진짜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것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니 내가 서울대 수석을 하면서도 공허함을 느꼈던 것도,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느끼는 얄팍한 기쁨 그 이상의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설문조사 결과와 한 달 동안 함께 지낸 스탠포드 친구들의 모습을 곱씹어 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무언가가 바로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었다는 것을.
어느덧 ALC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이 되었고, 모든 참가자들은 돌아가며 자신이 수행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저는 ALC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우선순위와 행복도를 조사해 분석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다른 참가자들은 내 발표에 귀 기울여 주었고, 교수님께서도 설문조사 주제와 분석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진원, 이 프로젝트는 조금만 더 발전시키다면 사회학과 석사 논문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정말 흥미로웠어!”
하지만, 나는 그런 칭찬에 기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서울대생이 가장 삶의 만족도가 떨어진다’라는 결과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내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스탠포드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이대로 계속 살다가는 취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돈만 벌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으면서 현재의 행복을 계속 5년 10년 후로 미루며 살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행복을 뒤로 미루면, 도대체 언제 행복해지는 거지?’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