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집에서 여름 나기 ⑤수박화채(花菜)
#여름 과일의 왕(王), 수박
한여름 과일, 하면 대표적인 것이 수박, 참외, 토마토다. 그중에서도 수박은 여름 과일로 으뜸이다. 단맛과 시원한 맛에 더해 과육(果肉)에 수분이 많아 한입 베물면 과즙(果汁)이 입속을 타고 줄줄 흘러넘치는데, 수박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징이다. 수박의 세 가지 식감(食感), 미감(味感)은 모두 여름하고 찰떡궁합이다. 수박이야말로 여름을 위해 태어난 과일이 아닌가, 싶다.
#수박화채에 대한 첫인상
나에게 수박화채(花菜)에 대한 첫인상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방학 때였다. 그날도 연중무휴 놀이터,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흙먼지 풀풀 날리게 놀다가 해거름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마당 수돗가에서 찬물을 받아 잽싸게 세수하고 대청마루로 올라섰는데, 신기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머니가 커다란 수박을 칼로 반으로 가른 뒤 숟가락으로 일일이 수박 속의 과육을 퍼내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까지 수박은 칼로 큼지막하게 잘라 손에 들고 먹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수박의 속살이 숟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현장을 처음 본 나는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는 뭐라고 짧게 대답했는데, 그것이 수박화채인 것은 나중에 알았다.
빨갛게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수박. ⓒUSDA / Scott Baue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수박 과육, 설탕, 얼음
수박 안에서 바깥으로 나온 조각난 수박 과육들은 몸에 박힌 씨를 토해냈다. 씨를 토해내는 일은 수박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고, 젓가락이 그 일을 대신했다. 씨가 몸에서 다 빠져나간 과육들은 스테인리스 양푼으로 옮겨졌다. 수박 반 통 어치의 과육들은 양푼을 가득 채웠다. 과육 위에 흰 설탕이 뿌려지고 얼음 가게에서 사 온 통얼음을 잘게 쪼개어 수북이 쌓았다. 수박화채가 완성됐다.
#수박화채의 맛
국자로 과육과 쪼갠 얼음을 투명한 유리그릇에 옮겨 담은 뒤 숟가락으로 퍼먹는 수박화채의 맛은 간담(肝膽)이 서늘하게 짜릿하면서 강렬했다. 설탕의 단맛과 수박의 단맛이 만나 또 다른 단맛을 만들어 냈는데, 그 단맛의 깊이를 잴 수 없었고 넓이는 헤아리기 힘들었다. 내가 그때 처음 먹어본 수박화채는 과일이라기보다 신기한 음식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서 수박을 먹는 방식은 으레 수박화채였다.
#더위를 가시게 하는 과일 요리, 수박화채
수박 과육과 설탕, 얼음 세 요소가 어우러진 수박화채는 우리 집뿐 아니라 당시 여름철 가정집에서 수박을 시원하게 먹는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선풍기 바람에만 의존하던 때라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찜통더위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 끝에 개발해 낸 과일 요리가 수박화채였던 셈이다.
수박은 과실 자체가 당도(糖度)가 높고 과즙이 많아 그냥 먹어도 달고 차가운 맛이 뛰어난 과일이다. 그런데도 설탕을 끼얹어 먹은 이유는 70년대만 하더라도 설탕이 귀한 시절이라 단맛에 대한 선호도가 유달리 높은 시대상이 음식 문화에도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때 냉장고 없이 여름을 나야 하는 가정에서도 얼음 소비가 많아 동네마다 얼음 가게가 성업(盛業)을 이룰 때라 수박화채가 하나의 과일 소비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 다른 여름 과일 토마토를 먹을 때도 설탕을 뿌려 먹었는데, 단맛과 시원한 맛이 수박에 못 미쳤다.
잘 익은 수박은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수박 겉면을 툭툭 치면 맑고 투명한 소리가 난다.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수박 고르는 요령
나는 어머니를 따라 동네 수박 가게나 길 건너 재래시장 수박 점포(店鋪)에도 자주 갔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대형 마트가 없던 때라 가게에서 직접 수박을 골라 사 들고 집에까지 와야 했다. 비닐 노끈으로 엮은 줄 바구니에 수박을 넣고 집에까지 들고 와야 했는데, 큰 놈은 무게가 5kg을 넘어 어머니를 도와 낑낑거리면서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박을 고르는 요령도 재미있었다. 수박은 속이 빨갛게 익어야 상품 가치가 높은데,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구부려 수박 겉면을 툭툭, 쳐서 맑고 투명하게 나는 소리를 듣고 판단하거나 수박 꼭지 색깔이 싱싱한지를 보고 알아채야 했다.
또 수박 표면에 검은 줄무늬가 뚜렷하면서 아래로 길게 이어져 있으면 속도 잘 익었으리라 생각했다. 장사꾼들은 시식용 수박으로 호객행위를 했는데, 수박의 한쪽 일부를 작은 삼각형 형태로 잘라 놓고 손님이 오면 과도(果刀)로 찔러 꺼내 속살을 확인시켜 주면서 맛도 볼 수 있게 했다.
사 들고 온 수박을 이등분하기 위해 식칼을 대자마자 쩍, 소리와 함께 갈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수박 속살이 빨갛게 잘 익었으면 다행이지만, 설익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설익은 수박은 버리기는 아깝고 그냥 먹기도 불편해, 설탕이나 꿀을 듬뿍 넣고 화채로 만들어 먹곤 했다.
씨 없는 수박 속. ⓒScott Ehardt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통얼음 쪼개기
수박화채에 넣을 통얼음을 조각내는 일도 흥미로웠다. 동네 얼음 가게에서 구매한 얼음 위에 송곳을 대고 식칼의 칼날 옆면으로 내리치면 얼음이 잘게 쪼개졌다. 얼음 조각이 동동 떠 있는 수박화채의 맛은 꿀맛이었고, 더위가 싹 가시는 시원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수박 냉채와 수박깍두기
수박 껍질을 이용한 요리도 있었다. 수박 껍질의 흰 부분을 채 썰어 무친 수박 냉채와 수박 껍질의 흰 부분을 네모나게 썰어 담근 수박깍두기가 대표적이다. 일반 나물무침과 똑같이 양념했는데도 밍밍한 맛이 가시지 않고 무와는 식감이 달라 맛이 별로였다.
역시 수박은 수박화채로 먹을 때 제일 맛있었다. 요즘에는 손이 많이 가고 귀찮기도 해 수박을 그냥 크게 잘라서 들고 먹는데, 그럴 때마다 수박화채 생각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