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골목길 오디세이 ③고물(古物) 장수
골목길 오디세이 ③고물(古物) 장수
#불시에 나타나는 고물 장수
‘고물 삽니다, 고철이나 폐지 삽니다. 헌책이나 그릇, 냄비도 삽니다’.
칼 장수가 정해진 요일에 동네를 찾았던 것과 달리 고물(古物) 장수는 불시(不時)에 불쑥 골목에 나타났다.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고물 장수는 낡고 망가져 못 쓰게 된 온갖 물건들을 취급했지만, 새것이나 다름없는 멀쩡한 물건들을 손에 넣는 운 좋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엿장수에게 갖다주고 엿으로 바꿔 먹는 물건들이 환금성(換金性)이 미미한 것이었다면, 고물 장수에게 내다 파는 물건들은 비교적 환금성이 괜찮은 편이었다. 액수가 많건 적건 고물 장수에게 내놓는 물건들은 다 돈이 되는 것들이었다. 고물이라는 글자 그대로 사고파는 물건이 자유로웠다.
#고물 장수 등장의 시그널, 놋방울 소리
엿장수의 등장을 알리는 시그널이 가위질 소리였다면 고물 장수의 시그널은 놋쇠로 만든 놋방울 소리였다. 고물 장수가 놋방울을 흔들 때마다 짤랑짤랑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손수레를 끌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동네를 돌던 고물 장수는 고물을 든 손님이 찾아오면 걸음을 멈췄다.
고물 장수에게 가지고 가는 고물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었다. 엿장수에게나 가지고 갈만한 시시껄렁한 물건에서부터 용돈벌이가 될 만한 것들, 제법 수입이 쏠쏠한 것들이었는데 아주 드물게 나중에 진귀한 예술품으로 밝혀지는 물건들도 섞여 있었다.
옛날 국민학교(초등학교) 교과서. ⓒ코리아넷 / 해외문화홍보원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각양각색의 고물들
옛날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 대로 그때의 고물을 주워섬겨 보면 잡다한 쇠붙이 종류의 고철(古鐵)을 비롯해 신문 폐지(廢紙), 헌책, 깨진 그릇과 냄비, 다 쓴 공책, 잡지, 빈 병, 철 지난 교과서와 참고서, 옛날 계산기인 주판(籌板), 찌그러진 세숫대야, 양은그릇, 놋그릇, 녹슬고 금 간 수저, 헌 구두, 가죽 제품, 해진 옷가지, 고장 난 탁상시계, 촉이 부러진 만년필, 구리가 들어 있는 전기선, 망가진 전기스탠드와 트랜지스터라디오, 수명이 다한 석유풍로(風爐), 다리가 부러진 의자 등이 있었다.
#환금성 높은 고물과 방치된 예술품
우리 집에서는 주로 서너 달 치의 신문과 1년 치 잡지 따위가 쌓일 때마다 고물 장수에게 넘겼는데, 수입이 꽤 짭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물 장수가 선호한 물건은 고철과 전깃줄, 놋그릇이었다. 환금성이 높아 돈이 됐기 때문이었다. 가정에서 많이 쏟아져 나오는 빈 병과 폐지, 헌책도 고물 장수가 반기는 물건이었다. 덩치가 큰 가정용 전기제품이나 석유풍로도 고물 장수의 괜찮은 벌이였으나 흔한 매물(賣物)은 아니었다.
흔치 않게 예술품이나 문화재가 고물 장수의 손에 넘어가는 일도 있었다. 집안 다락방에서 먼지를 덮어쓰고 방치되다시피 한 것들로 서예 작품과 고서(古書), 산수화, 도자기 따위가 그랬다. 이런 물건 중 훗날 고가(高價)의 호가(呼價)를 기록해 화제가 되는 일도 있었다. 고물 장수에게 물건을 넘긴 사람이나, 고물 장수나 당시에 그 가치를 알 리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서울 중구 황학동 풍물시장. 온갖 진기한 옛날 물건들을 만나볼 수 있다. 맨 아래 가운데에 옛날 계산기인 주판이 보인다. ⓒ코리아넷 / 해외문화홍보원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고물값 산정 방식
고물 장수가 고물값을 매기는 방식은 대략 세 가지였다. 내놓는 매물(賣物) 중 상당수는 고만고만한 것들이라 저울로 무게를 달아 값어치를 평가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물건 상태가 양호하거나 고물을 사고파는 가게인 고물상들이 군침을 흘릴만한 것들, 전기제품 등은 손님과 흥정해서 값을 매겼다. 무게를 달기도 그렇고 흥정 대상도 아닌 물건들은 고물 장수가 눈대중으로 가치를 정했는데 이런 사례도 꽤 있었다.
#운수 좋은 날
고물 장수는 해거름이면 하루 장사를 마무리하는데 손수레가 돈 되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날에는 놋방울 소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곤 했던 모습을 여러 번 봤었다. 그런 날, 단골로 거래하는 고물상으로 손수레를 끌고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을 고물 장수는 일당(日當)을 챙긴 뒤 분명 이름 모를 대폿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沙鉢)을 기분 좋게 들이켰을 것이다.
이제는 낡고 못 쓰게 된 물건뿐 아니라 멀쩡한 물건들을 내다 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폐기물 처리 비용을 떠안고 버려야 하는 시대라 격세지감(隔世之感)도 이만저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