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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골목길 오디세이 ②길거리의 육체 예술가, 칼 장수

by 박인권

골목길 오디세이 ②길거리의 육체 예술가, 칼 장수


#부엌칼의 생명은 칼날

‘칼 갈아요, 칼.’ ‘칼이나 가위 갈아요.’

칼 장수 아저씨의 목소리는 낮게 깔린 중저음이지만 힘이 있었고, 리듬감도 묻어났다. 70년대 동네를 도는 행상꾼 중 칼 장수는 주부들이 반긴 칼 갈기의 장인(匠人)들이었다. 부엌살림 중 식재료를 다듬고 준비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도구가 칼이었다.


이른바 부엌칼로 불리는 식칼. 공산품(工産品)의 질적 수준이 지금만 못한 데에는 식칼도 마찬가지였다. 식칼의 생명은 칼날인데, 칼날이 서고 날카로워야 제 몫을 다 했다. 어머니는 칼날이 무뎌져 칼이 안 들면 정기적으로 식칼을 칼 장수에게 맡겼다.


어머니들의 부엌살림 도구 1호 식칼. ⓒSusan Slate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부엌살림 도구 1호, 식칼의 다양한 용도

대파와 양파, 쪽파, 무, 김치, 감자, 당근, 소고기, 돼지고기, 오이, 호박 등 온갖 식재료를 자르고 썰 때 사용하는 식칼은 어머니들의 부엌살림 도구 1호였다.

식칼의 용도는 다양했다. 채소나 고기를 자르고 써는 것뿐 아니라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다지거나 소량의 마늘을 빻을 때도 쓰였다. 고기를 다질 때는 칼날을 사용하지만, 마늘을 빻을 때는 식칼 자루 머리가 동원됐다.


#식칼과 절구

식칼 자루 머리 부분은 둥글넓적해 네댓 개의 마늘을 빻기에 적당했다. 다량의 마늘을 빻을 때는 절구를 이용했다. 옛날 절구와 절굿공이는 맷돌처럼 돌로 만든 것이라 여간 무겁지 않았다. 어릴 때 몇 번 들어봤는데, 낑낑대며 땀을 뻘뻘 흘린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 가정에서 쓰는 절구와 절굿공이는 나무 재질이라 크기도 작고 옮기기도 편하고 사용하기도 편하지만 쓸 일이 별로 없다. 절구통에 넣고 빻는 식재료는 마늘이 대표적인데 마트에서 파는 다진 마늘로 대체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다진 생강도 마트에 가면 널려 있다. 가정에서 절구질할 일이 거의 없는 것도 시대상의 산물이라 여겨진다.

#칼날 세우기와 숫돌

식칼의 재질은 스테인리스라 시간이 지나면 칼날이 무뎌지거나 칼날의 이가 빠져 자르고 썰기가 불편했고 억지로 힘을 주다가 손을 다치는 일도 있었다. 칼날을 갈고 다듬어 예리하게 세우는 칼 갈기는 얼핏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숙련된 솜씨가 필요했다. 칼 장수는 칼날을 숫돌에 갈았다. 숫돌은 강철로 만든 칼이나 가위 등 연장을 갈아서 날을 세우는 데 사용되는 돌이다.


선사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숫돌은 푸른빛이 도는 청숫돌과 흰빛이 나는 백 숫돌이 있다. 돌 재질의 거친 정도에 따라 거친 숫돌, 중 숫돌, 완성 숫돌로 구분된다. 가정용 식칼을 가는 데에는 주로 중 숫돌이 사용됐다.


식칼 등 다양한 종류의 칼을 보관하는 목제 칼꽂이. ⓒRene Ehrhardt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칼날 갈기의 미학(美學)

칼 장수는 숫돌과 칼 몸통에 물을 뿌려가면서 칼날을 가는데, 칼날이 앞을 향하도록 한 채 두 손으로 칼 전체를 옆으로 꽉 쥐고 밀고 당기기를 무한 반복한다. 칼을 갈면서 칼 장수는 수시로 칼날 상태를 점검하는데 칼날의 한쪽 면이 만족스러우면 칼을 뒤집어 반대편 칼날을 갈기 시작한다. 만족스러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칼날 끝에 손가락 끝을 대 보는 촉감이다.


칼날을 갈 때는 칼자루를 한 손에 쥐고 나머지 손의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 혹은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뺀 세 손가락을 펴 칼 몸통에 댄 채 칼날 부분이 숫돌에 밀착되게 밀고 당겨야 한다. 칼날의 반대 면을 갈 때는 칼을 옆으로 180도 뒤집어 칼자루를 다른 손으로 바꿔 잡고 이전과 같은 요령을 되풀이하면 된다. 칼날의 경사진 곳 전부가 숫돌에 닿은 채 앞, 뒤로 이동할 수 있도록 기울기를 잘 맞추는 것이 포인트다.


#칼 갈기와 힘의 강약 조절

칼 장수가 칼을 밀고 당길 때 들어가는 힘은 강약 조절이 중요한데, 그 비결은 숱한 시행착오 끝에 몸으로 익힌 칼 장수만의 감각으로만 알 수 있다. 칼을 가는 데 필요한 힘은 허리를 축으로 양팔과 양손 세 군데에서 나오는데, 출처가 세 곳인 이 힘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체력 안배에도 성공하고 칼날 세우기에도 성공한다.

숫돌에 칼을 갈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칼을 가는 행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체력이 소모된다. 칼 장수는 칼을 가는 도중에 손끝으로 칼날을 한 번씩 만져보면서 그 느낌에 따라 칼 몸통에 물을 조금씩 뿌려준다. 물을 뿌리는 때와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도 오랜 훈련에서 감각적으로 익힌 내공(內工)에서 나오는 것이다.


식칼은 대파와 당근, 양파 등 각종 채소를 자르고 써는 필수 도구다. ⓒPigup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움푹 팬 숫돌 몸체와 고인 물의 정체성

칼 장수는 식칼뿐 아니라 가정에서 쓰는 가위도 많이 다뤘다. 날을 세우는 기본적인 요령은 칼과 같지만, 가위의 경우 두 개의 날을 서로 벌려 갈아야 해 더 까다로웠다. 칼 장수가 칼이나 가위를 갈고 있을 때 숫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숫돌 가운데가 움푹 팬 모습이 눈에 띈다.


오랜 세월 칼과 가위를 가느라 희생한 숫돌 몸체의 흔적이다. 숫돌과 칼 몸통에 뿌린 물은 숫돌 가운데에 고여 있는데, 칼날을 갈수록 숫돌과 쇠 기운이 물에 스며들고 물빛에도 숫돌과 쇠의 색깔이 침투한 기미가 보인다.


#길거리 육체 예술, 칼 갈기

숫돌과 물, 칼 장수의 몸과 감각적인 판단력에 힘입어 칼날이 새 생명을 얻는 칼 갈기는 길거리의 육체 예술로 손색이 없었다.


70년대에 주택가를 돌며 장사한 칼 장수는 인기가 많았고 벌이도 괜찮은 편이었다. 요즘도 하루 종일 칼로 생선 손질을 하는 생선 시장에 가면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은 칼 장수가 단골들이 맡긴 생선 칼을 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옛날처럼 손과 숫돌이 아니라 기계로 가는 방식만 바뀌었다.


세월의 흐름에 떠밀려 칼 갈기도 이제는 기계가 떠맡는 시대가 됐다. 옛날식 수제(手製) 칼 갈기는 지금도, 앞으로도 보기 드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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