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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골목길 오디세이 ④찹쌀떡과 메밀묵, 홍게 장수

by 박인권

골목길 오디세이 ④찹쌀떡과 메밀묵, 홍게 장수


#겨울밤과 찹쌀떡

70년대 겨울의 밤은 유달리 일찍 찾아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밥솥에 밥을 안치고 찌개를 끓이고 나물 반찬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어둑어둑해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아이들에게 해 질 녘은 일과(日課)가 끝나는 신호였다.


일찌감치 저녁밥을 먹고 작은 방에서 학교 숙제를 끝낸 다음 안방으로 건너와 가족들과 함께 흑백 TV를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쯤, 골목 너머에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소리가 메아리쳐 울려왔다.


#3음절 두 단어의 마력(魔力)과 찹쌀떡 쟁취 작전

‘찹쌀떡~ 메밀묵~’

3음절의 두 단어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겨울밤의 정적을 깨는 그 울림에는 희한하게도 군침을 돌게 하는 마력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와 형들은 슬그머니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이제나저제나 했다. 어머니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던 중 마침내 큰형이 우리끼리만 통하는 무언(無言)의 신호, 눈짓을 막내인 나에게 보냈다.


그럴 때 내가 닫힌 어머니의 마음을 여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저녁밥을 시원찮게 먹어 아까부터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난다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었다. 너희 속셈을 뻔히 다 안다는 듯,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짓고 난 어머니는 ‘오늘만’이라는 단서를 붙이고서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네주곤 했다.


70년대 겨울 밤참으로 인기가 많았던 찹쌀떡. ⓒJirka Matousek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특별한 밤참, 찹쌀떡
나무통을 어깨에 멘 찹쌀떡 장수도 이런 집안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는지, 그때까지 골목길을 떠나지 않고 3음절의 두 단어를 나지막하지만 감질나게 외치고 있었다. 나와 형들은 메밀묵보다 찹쌀떡을 좋아해 찹쌀떡 한 봉지를 사서 나눠 먹었다.


돌이켜보면 그 맛이 특별히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야심(夜深)한 시간에 어머니를 졸라 쟁취한 특별한 밤참이라는 점에 의미를 뒀던 게 아닐까, 싶다. 특별한 밤참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쫀득쫀득하고 말랑말랑한 찹쌀떡 특유의 식감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이 찹쌀떡을 먹을 때면 어머니는 꼭 동치미 국물을 한 그릇 떠 와 내밀었다. 급하게 찹쌀떡을 먹다 보면 목이 막히고 체할 수 있다는 염려에서였다. 떡을 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떡고물이 잔뜩 묻은 찹쌀떡에서는 온기(溫氣)가 느껴졌고 제법 큼지막하기도 해 먹고 나면 나름 포만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찹쌀떡의 맛은 고소하고 찰졌다. 어머니의 찹쌀떡 인심은 후(厚)하지도 박(薄) 하지도 않았다.


#이름만 영덕 대게인 홍게

한겨울 저녁 무렵 골목길 어귀에는 홍게 장수도 자주 나타났다. 홍게 장수가 끌고 다니는 손수레에는 빨간 홍게가 가득 실려 있었고, 게를 찌는 대형 찜기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났다. 손수레 한쪽에 영덕 대게라고 손으로 쓴 글씨가 크게 적힌 나무판이 걸려 있었는데, 5마리에 얼마, 10마리에 얼마라고 명시돼 있었다.


가격을 보면 영덕 대게일 리가 없는 데도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영덕 대게가 아니라는 점은 구경꾼들도 모를 리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모양과 크기가 비슷해 이름만 영덕 대게인 홍게는 싼값에 먹을 수 있어 인기가 많았고 잘 팔렸다.


싼 맛에 많이 사 먹었던 홍게. ⓒTotti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홍게 장수의 유인책

알고도 속아준 것인지, 모르고 속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싼 가격에 더해 홍게 장수 손수레 찜기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찌는 과정에서 코끝을 취하게 하는 홍게 냄새는 홍게냐, 대게냐의 뻔한 진실논쟁과 상관없이 분명 구매 욕구를 자극한 강력한 유인책(誘引策)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홍게는 개체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대게나 꽃게보다 훨씬 싸다. 크기와 모양이 대게를 쏙 빼닮아 대게로 속여 파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암컷의 연중 포획이 금지돼 있으나 70년대에도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홍게의 표준명은 ‘붉은 대게’다.


껍질이 단단하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놈은 박달 홍게라고 부른다는데, 이놈은 상품 가치가 높아 홍게 중에서도 귀한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홍게 중에 살이 별로 없고 물렁물렁한 놈은 속칭 물 게로 통하는데 그 시절 길거리 홍게 장수가 취급한 홍게가 그렇지 않았나, 싶다.


홍게 딱지 밥. ⓒbryan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홍게탕

싼 게 비지떡이라고, 몇 번 먹어본 홍게는 살이 물렁물렁하고 먹을 게 별로 없었다. 가위로 홍게 다리 껍질을 횡으로 길게 자른 뒤 젓가락을 집어넣어 다리 살을 빼먹곤 했는데, 애쓴 보람을 느끼기에는 살점이 부실했다. 아쉬움을 달랜 방법도 있었는데, 홍게 딱지 뚜껑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숟가락으로 밥을 꾸역꾸역 욱여넣은 뒤, 딱지에 붙은 살과 잘 섞어 먹는 식이었다. 짭조름한 홍게 육즙이 밥알에 배 맛이 괜찮았다.


남은 홍게는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넣어 끓인 홍게탕으로 만들어 먹었다. 홍게탕에 밥을 말아 먹으면 그런대로 맛이 났다. 싼 게 비지떡도 다 쓸모가 있었다.


#멍게 해삼 장수

요즘처럼 여름철에는 멍게 해삼 장수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손수레에 멍게 해삼을 싣고 동네 어귀에 진을 친 멍게 해삼 장수는 잔 소주와 멍게, 해삼을 썰어 팔았다. 퇴근길 직장인이나 동네 아저씨들은 선 채로 멍게 해삼을 안주 삼아 잔 소주 몇 잔을 들이켰고, 나도 친구들과 가끔 멍게와 해삼을 주문해 초장에 찍어 먹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멍게는 흐물흐물해서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입안을 맴도는 바다향이 입맛을 돋웠고, 딱딱하면서 찰진 해삼은 씹는 맛이 그만이었다. 어릴 때 맛을 들인 멍게와 해삼은 지금도 좋아한다.


손수레에서 트럭으로 바뀐 길거리 홍게 장수는 요즘에도 드물게 볼 수 있지만, 멍게와 해삼을 파는 행상꾼은 포장마차로 대체된 지 오래다. 길거리 음식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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