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골목길 오디세이 ⑤뻥튀기와 강정
골목길 오디세이 ⑤뻥튀기와 강정
#먹거리, 볼거리의 천국 재래시장
고향 집 앞 골목길은 자동차가 드나들 정도로 제법 넓었다. 그 길을 따라 150m 남짓 걸어가면 버스가 다니는 아스팔트 대로(大路)가 나왔고 대로를 건너면 재래시장 입구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재래시장은 먹거리와 볼거리의 천국이다.
육류와 생선류, 채소류, 건어물, 군것질거리 따위의 먹을거리와 식당들이 즐비했고 간장 가게, 참기름 가게, 쌀가게, 떡집, 고추 가게, 신발 가게, 옷 가게, 서양식 여성 옷 전문 양장점, 한복 가게, 수선 가게, 구두 가게, 서양식 일용잡화 전문 양품점, 모자 가게, 실 가게, 철물점, 전자기기를 수리 판매하는 전파상, 열쇠 가게, 그릇 가게, 액세서리 가게, 땅에 물건을 놓고 파는 각종 좌판점(坐板店)과 포장마차 등 세상 물건과 음식이 전부 모여 있었다.
#70, 80년대 국민 간식 뻥튀기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고향 동네 전통 재래시장에는 진기한 볼거리도 많았는데, 특히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가 뻥튀기 장사였다. 장터 한구석 늘 정해진 자리에서 장사하는 뻥튀기 장수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남녀노소가 눈도장을 찍는 인기 만점의 볼거리였다.
뻥튀기는 쌀이나 옥수수, 보리 따위의 곡물과 바짝 말린 떡국용 떡을 밀폐된 용기 안에 넣고 가열하여 튀긴 음식인데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튀밥이라고 했다. 쇠로 된 뻥튀기 기계 속에 곡물을 넣고 열과 압력을 이용해서 튀긴 뻥튀기는 70, 80년대 국민 간식이었다. 뻥튀기 장수는 시장터뿐 아니라 동네 공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심심풀이 주전부리 쌀 튀밥에 조청을 묻혀 만든 쌀강정. ⓒ코리아넷 / 해외문화홍보원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순서를 기다리는 긴 깡통 대열(隊列)
누구나 튀밥을 주전부리로 즐겨 먹던 시절이라 뻥튀기 장수 앞에는 쌀이나 옥수수 등 곡식을 튀기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다들 생업(生業)에 쫓기고 시간이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라 곡식을 담은 큰 깡통들이 길게 줄지은 모습은 당시에 흔한 풍경이었다. 깡통 순서대로 뻥튀기 장수만 아는 표시를 해뒀는데, 그 표시를 확인하고 뻥튀기를 찾아가곤 했었다. 어릴 때 나도 어머니 심부름으로 뻥튀기 장수를 자주 찾았었다.
튀밥은 곡물의 종류에 따라 쌀 튀밥, 옥수수 튀밥, 보리 튀밥, 떡국 튀밥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입이 심심할 때 주전부리로 먹기 딱 좋은 군것질거리로 맛도 있고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튀밥은 입맛이 없고 허기질 때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옥수수 튀밥. 심심풀이 주전부리로, 호프집 서비스 안주로 존재감이 여전하다.
#뻥튀기의 원리와 미학적 가치
뻥튀기의 원리는 미학적 가치가 충분해 흥미진진한데, 고온(高溫)과 고압력(高壓力)을 이용한 대략적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쌀 등 곡물을 넣은 원통 모양의 뻥튀기 기계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밀폐 고정한 뒤 화롯불 위에 올린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위아래로 원운동을 하며 돌아가도록 제작된 뻥튀기 기계 손잡이를 돌리면서 가열해 용기 내부 압력을 상승시킨다.
-밀폐된 뻥튀기 기계에 열을 가할수록 용기 속의 압력이 올라간다.
-뻥튀기 기계 뚜껑에는 시간을 재는 타이머가 달려 있는데, 적정 시간에 도달하면 뻥튀기 기계 뚜껑에 기다랗게 생긴 둥근 철 그물망을 갖다 대고 걸쇠를 뚜껑 고리에 걸어 열어젖힌다.
-그 순간 ‘펑’, 하는 폭발음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뻥튀기가 쏟아져 나온다. 펑, 소리는 아주 컸는데 귀청이 멍멍할 정도의 굉음(轟音)이었다.
-펑 소리가 나는 이유는 용기 안의 공기가 팽창하면서 높아진 압력이 바깥으로 갑자기 한꺼번에 방출돼 외부 공기와 크게 충돌하기 때문이다. 용기 안 곡식의 낱알에 남아 있던 물기도 압력의 방출과 동시에 급격한 속도로 기체로 변하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의 정체이기도 하다.
-뚜껑이 열리면서 뻥 튀겨진 곡물은 그 크기가 헐크처럼 몸집이 수 배로 부풀어 오르고 씹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나면서 먹기 좋은 간식이 된다.
#뻥튀기의 비법, 감미료
뻥튀기 장수는 뻥튀기 기계 뚜껑을 열기 전 ‘뻥, 이요!’ 소리를 힘차게 외쳐 주위를 환기(喚起)시키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깜빡 잊은 게 하나 있다. 뻥튀기 장수가 곡물을 뻥튀기 기계 안에 넣을 때 사카린 따위의 감미료(甘味料)를 추가하는데 튀겨진 곡물에서 단맛이 나는 이유다.
#뻥튀기의 3대 특징
뻥튀기의 원리에 비추어 뻥튀기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뻥튀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펑, 하는 소리의 전율,
둘째, 시야를 가리는 뿌연 연기의 아득함,
셋째, 갓 튀겨진 뻥튀기의 달고 부드러운 맛
전통 한과(漢菓)의 하나인 유밀과(油蜜果).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뻥튀기 관전의 하이라이트
뻥튀기 관전의 하이라이트는 뻥튀기 장수가 뻥튀기 기계 뚜껑을 열기 직전 2~3초간의 짧은 적막(寂寞)에 숨어있다. 적막의 시간은 아주 짧지만, 적막이 깨지기 전까지 구경꾼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숨을 조린다. 숨을 조리는 이유는 곧 귀청을 때릴 벼락같은 굉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앞을 가리는 연기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두고 혼자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명절 필수 음식 강정
뻥튀기, 하면 또 강정을 빼놓을 수 없다. 옛날 명절 필수 음식으로 명성이 높았던 강정은 쌀 튀밥에 조청을 묻히고 밀대로 밀어 사각형 형태로 잘라 만든 것이다. 쌀강정, 콩강정, 깨강정, 땅콩강정이 그런 것들이다. 깨강정과 콩강정은 볶은 깨와 볶은 콩을 이용해 만들고, 땅콩강정은 쌀강정 위에 땅콩을 얹은 것이다.
고향 집에서도 명절 때마다 쌀강정과 콩강정, 깨강정을 주문 제작해 제사상에 올리고 두고두고 가족들이 나눠 먹었다. 전통 한과(漢菓)인 유밀과(油蜜果)도 강정의 한 부류인데 제사상에 자주 오르는 제수(祭需) 음식이었다. 유밀과는 밀가루나 찹쌀가루를 꿀과 설탕과 섞어 반죽한 다음 타원형으로 빚어 기름에 튀겨 낸 뒤 알록달록한 식용색소를 입힌 것이다. 수요가 여전한 튀밥과 달리 강정의 인기는 예전만 같지 않다.
뻥튀기 장수 앞에는 늘 구경하는 아이와 어른들이 몰려 있었고, 펑, 소리가 날 즈음에 모두 귀를 막고 곡물이 뻥튀기로 변신하는 광경을 숨 졸이며 지켜보곤 했다.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일부러 뻥튀기 현장을 보기 위해 시장터나 동네 공터를 자주 찾았던 기억이 난다.
압착 기계로 눌러 만든 뻥튀기.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여전히 건재한 뻥튀기의 존재감
요즘도 아파트 단지나 주택 단지 부근에서 뻥튀기 트럭 장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뻥튀기 과자를 판매하는 가게도 곳곳에 있고 대형 마트 식품매장에서 팔기도 해 뻥튀기 수요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영화관에서 파는 뻥튀기인 팝콘은 옥수수를 튀긴 것인데, 튀기는 방식이 옛날 뻥튀기와 달라 모양도 다르고 맛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다.
옛날식 옥수수 뻥튀기는 지금도 건재한데, 파는 곳도 많고 호프집에서 서비스 안주로 내놓는 경우도 많다. 뻥튀기 트럭 장사가 판매하는 뻥튀기 중에는 압착 기계로 눌러 만든 뻥튀기도 있다.
싼값에 맛있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심심풀이 군것질거리 뻥튀기의 존재감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