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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골목길 오디세이 ⑥서커스 공연

by 박인권

골목길 오디세이 ⑥서커스 공연


#화려한 진기명기 쇼

70년대 서커스 공연은 인기가 많았다. 줄타기, 묘기 대행진, 마술(魔術), 말 타고 재주부리기 등 진귀한 곡예(曲藝)와 동물들의 재주넘기로 꾸며진 서커스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넓은 공터가 많았는데, 그곳에서 서커스 공연이 펼쳐졌다.


서커스단의 한자어는 곡마단(曲馬團)인데, 한자를 뜯어보면 탁월한 번역 조어(造語)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곡마단을 한자 원어에 충실하게 해석하면 둥근 원형 극장에서 말 타면서 각종 곡예를 선보이는 기예(技藝) 단체를 말하는데 3음절의 한자로 서양에서 유래된 초창기 서커스의 정의를 명쾌하게 규정한 점이 놀랍다.


세월이 지나면서 강도 높은 훈련을 몸에 익힌 단원들이 화려한 볼거리를 개발해 낸 진기명기 쇼로 뿌리내리며 TV 문화가 정착되기 전까지 서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게 바로 서커스단이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에도 서커스단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공연을 선보였다. 서커스단은 한 번 오면 같은 곳에서 3~4일 공연하고 다른 장소로 떠났다. 서커스단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한 유랑극단(流浪劇團)이었다.


장대와 의자를 이용한 진귀한 묘기. ⓒjennybento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천막 원형 극장과 얌체족

공연장의 형태는 천막 원형 극장이었는데 천막을 둘러쳐 한시적으로 만든 임시무대였다. 공연장이 일반 건물이 아니라는 특수성 때문에 천막을 덮어씌운 공간 곳곳에 공짜 입장을 시도하는 얌체족들을 단속하는 경비원들이 버티고 있었다. 눈치 빠르고 몸이 날쌘 아이들은 경비원이 잠시 한눈을 팔거나 잠깐 자리를 비우는 사이 잽싸게 천막 아래 틈새를 파고들어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공짜로 공연을 보고 나온 아이 몇몇은 눈만 껌뻑거리는 아이들 앞에서 마치 영웅담을 털어놓기라도 하듯이 자신들이 목격한 신기한 묘기 장면을 침을 튀겨가며 자랑하곤 했었다.


#서커스 공연 홍보 풍물패

공연이 시작되기 며칠 전 서커스단은 풍물패를 이끌고 동네 골목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선전에 열을 올렸는데, 나는 서커스 구경도 좋아했지만, 이 광경을 특히 좋아했다. 광대 복장을 한 남녀 단원을 앞세우고 바람잡이 단원 뒤를 등에 큰 북을 맨 북재비(고수, 鼓手) 단원이 뒤따랐는데 북재비가 다리를 힘차게 내디딜 때마다 쿵쿵, 쿵쿵, 하고 북소리가 크게 울려 흥을 돋웠다.


북재비의 한쪽 다리에는 북채를 움직이게 하는 탄성(彈性) 좋은 끈이 연결돼 있었다. 북재비는 풍물패가 지나갈 때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는데 발을 굴리며 북을 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북재비 뒤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낄낄대고 떠들었는데 그 모습은 풍물패가 동네를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북재비는 서커스단 공연 홍보의 일등 공신이었다.


외줄 위에서 묘기를 부리고 있는 서커스 단원들. ⓒjennybento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천막 극장의 안과 밖

나는 동네 천막 극장에서 서커스 공연을 두서너 번 본 기억이 있다. 천막 극장은 바깥에서 볼 때 하고 들어갔을 때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천막 극장 안으로 입장하는 순간 웅장한 내부 설치물과 형형색색의 장비, 화려한 분장을 한 단원들의 모습에 더해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혼이 나갈 뻔했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천장 높이 매달린 공중그네와 높이가 십수 미터는 되고도 남을 철제봉(棒), 입에 문 막대기 위에 접시를 놓고 돌리기에 바쁜 단원과 말을 타고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달리고 있는 단원이 보이는가 하면 저쪽 구석에서는 솜뭉치에 붙은 불을 입 안에 머금었다가 막 내뿜는 불 쇼 묘기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외발자전거 묘기와 공중그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공연 보기 좋은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건장한 남자 단원이 나와 외발자전거를 신나게 타면서 천막 극장 가장자리를 따라 곡선을 그리며 질주했다. 그 무렵 나도 두발자전거를 탈 때라 자전거라면 나도, 하고 혼자 어쭙잖은 객기(客氣)를 속으로 부리다가도 막상 외발자전거를 제 몸 다루듯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 장면은 그때부터였다. 남녀 한 쌍의 단원이 고개를 높이 쳐들어야 보이는 서로 다른 공중그네에 매달려 좌우로 20~30m 거리를 엇갈리게 왔다 갔다, 하는가 싶더니 별안간 훌쩍 날아올라 견우직녀 상봉하는 모습을 연출하는데, 정신이 아찔해지고 식은땀이 다 나 혼이 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인간 탑 쌓기 묘기. ⓒKispados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다양한 서커스 묘기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서커스 공연의 묘기를 꺼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외발자전거 연기자가 한술 더 떠 외줄 위에서 자전거 타기,

-여러 개의 접시나 공, 모자를 공중으로 던지고 받아내기를 밥 먹듯 하는 저글링,

-인간 사다리가 따로 없는 인간 탑 쌓기,

-누워서 발로 통을 돌리거나 위로 띄우는 통 돌리기,

-짙은 화장에 다부진 몸매의 한참 위 누나뻘 되는 여자 단원이 봉에 매달려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이상야릇한 춤사위를 연출하는 묘기,

-지금의 기계체조에서나 볼 수 있는 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링 묘기,

-멀찌감치 떨어진 단원의 머리 위에 얹힌 사과를 겨냥한 칼 던지는 묘기,

-지름 1m 크기의 불타오르는 원형 구조물 속을 통과하는 고난도 불 쇼 묘기,

-사람인지 연체동물인지 헷갈리고도 남을 연체(軟體) 곡예,


허리를 뒤로 완전히 꺾은 연체 곡예 묘기. ⓒDominic Deusdedith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연체 곡예

연체 곡예는 몸을 비틀거나 꼬아 인체 유연성의 극한을 추구하는 서커스 기술인데,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바닥에 앉아 상체를 앞으로 굽힌 상태에서 머리를 가랑이 사이로 통과시켜 엉덩이와 마주 보는 희한한 자세, 허리를 뒤로 완전히 꺾어 엉덩이에 갖다 붙이는 자세, 두 다리 사이로 머리를 내민 뒤, 바닥에 앉는 자세가 그것이다.


세 자세 모두 인체공학적으로 불가능한 미스터리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서커스 단원의 몸도 사람의 몸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이르러면 꼭 그렇지만도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커스라는 용어가 기억 저편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 지 오래지만, 1925년에 창단된 100년 역사의 동춘서커스단은 아직도 활동 중이다. 동춘서커스단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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