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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기와집에서 겨울나기 ②석유파동과 동네 주유소

by 박인권

기와집에서 겨울나기 ②석유파동과 동네 주유소


#을씨년스러웠던 1973년 겨울

저무는 1973년 겨울 한복판은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강추위에 할퀴면서도 스스로 가슴 한구석을 따스하게 다독였던 최후의 보루, 낭만적 고독은 불안감의 포로가 돼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그들이 내딛는 보도블록의 피로감도 여느 겨울과는 달랐다.


시민들의 눈빛에는 상실감, 세 글자가 아른거렸다. 실질 소득의 감소가 불러온 상실감의 진원지는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히 먼 곳이라 어찌할 수 없었고, 상실감의 위력은 전 세계를 강타한 메가톤급이라 온 나라에 비상이 걸렸다.


#제1차 석유파동

비상 발령의 원인은 중동발 석유파동이었다. 1973년 10월 6일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은 지구촌 핵심 자원 유가(油價)의 폭등을 불러왔고 세계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 경제에 유가 상승은 악재 중의 악재였고 수출 전선은 물론 국민 살림살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에 급제동이 걸리자, 소비자 물가 상승이 뒤따랐고 이는 가뜩이나 팍팍한 가계 경제를 순식간에 냉각시켰다. 70년대 한국 가정의 필수 난방 보조기구는 석유난로였고 우리 집도 다를 바 없었다. 유가 상승 태풍이 불자 석유 사재기 소문이 들끓었고 주유소마다 기름 확보에 조바심을 낸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제2차 석유파동의 원인이 된 이슬람 혁명 당시 이란의 수도 테헤란 아자디 탑 앞 시위대 모습.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문전성시를 이룬 동네 주유소

1973년, 그해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느 때처럼 플라스틱 기름통을 들고 동네 주유소를 찾았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석유를 사러 온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이전에도 몇 번 주유소를 와 봤지만, 이날처럼 사람들로 북적인 모습은 처음이라 놀랐다.

앞사람 뒤에 빈 플라스틱 통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내 뒤로 차례대로 사람들이 따라붙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석유를 가득 채운 기름통을 들고 집에 온 나는 비로소 문전성시를 이룬 주유소 풍경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중재에 따라 16일 만에 막을 내렸지만, 유가 상승 파동은 이듬해 봄까지 계속됐다. 석유수출국기구의 석유 감산(減産) 조치에 따라 평소보다 무려 5배나 유가가 올랐다.


#허리띠를 졸라맨 가계(家計) 경제

73년 12월부터 74년 2월까지 매일 석유난로를 켰던 우리 집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맸다. 제일 먼저 취한 조치가 대청마루의 석유난로 가동 중지였다. 대청마루에 식구들이 머무는 동선(動線)은 3개월 동안 동결(凍結)됐다. 안방과 작은 방에 놓인 석유난로의 가동 시간도 줄였다. 낮에는 가급적 난로를 켜지 않았고 오전 시간과 해거름부터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만 난롯불을 밝혔다. 그마저도 상시 가동을 자제하고 ‘1시간 작동, 30분 정지’라는 원칙을 지켜 기름 소모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지혜를 짜냈다.


여기서 70년대 주유소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때 주유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지금과 확연히 달랐다. 당시 사람들은 자동차 주유가 아니라 석유난로 연료용 기름을 사기 위해 주유소로 몰려들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 대수 통계에서 짐작할 수 있다.


70년대 주유소 풍경은 요즘 주유소와 확연히 달랐다. ⓒPARK IN KWON


#1973년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

1973년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17만 대가 채 못됐다. 국토교통부가 밝힌 2023년 상반기 기준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 대수 2천5백75만 대의 150분의 1, 0.67% 수준이다. 1975년 국내 인구 3천4백70만여 명 대비 자동차 보유자가 200명당 1명꼴이었다. 현재 1.99명 당 1명이 자동차를 소유한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자가운전자 비중이 2023년 상반기 대비 100분의 1에 지나지 않았고 석유난로가 가정 난방의 빼놓을 수 없는 보조재였다는 점에서 당시 주유소의 실태는 지금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차 석유파동

4년이 지난 1978년 12월 또 한 번의 석유파동이 불어닥쳤다.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이란의 석유 수출 금지 조치와 이란-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산유국들의 석유 감산 정책이 원인이 된 2차 석유파동은 1980년 7월까지 계속됐는데 유가가 2.4배 오르는 등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 후유증을 낳았다.


1980년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 대수는 고작 50만 대를 돌파했을 뿐이라 주유소에는 여전히 가정용 난방 및 취사 보조 연료인 석유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주 고객이었다. 4년 전처럼 주유소마다 기름을 사러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고, 집 집마다 기름을 아끼느라 전전긍긍했다.


어머니는 삼시세끼 취사(炊事)를 되도록 연탄불에만 의지한 채 석유난로 사용을 자제했고, 겨울철에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석유난로를 켜지 않았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용기인 깔때기. 깔때기를 뒤집은 모습. ⓒPARK IN KWON


#플라스틱 석유통과 깔때기

고향 집 석유난로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에 선한 장면이 있는데, 석유난로에 기름을 채우던 방식이다. 석유가 든 기름통 주입구(注入口)는 오른쪽으로 틀면 열리고 왼쪽으로 돌리면 잠기는 마개로 채워져 있는데 석유난로 투입구에 바로 연결하면 한꺼번에 기름이 쏟아지기 때문에 깔때기라는 보조 도구가 꼭 필요했다.


깔때기는 위는 넓고 아래는 좁게 생긴 용기(容器)인데 입구가 좁은 난로 투입구에 석유를 부을 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생활 도구였다. 입이 커다란 플라스틱 깔때기를 석유난로 투입구에 꽂고 기름통을 두 손으로 받쳐 든 뒤 조심스레 기울이면서 석유를 조금씩 부어 나가 연료통이 다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고향 집에서 쓰던 석유통은 10리터용이라 기름이 다 찬 상태에서는 한 손으로 들고 난로 연료통에 기름을 부을 수가 없었다.

70년대 석유난로에 기름을 채우기 위해서는 깔때기가 꼭 필요했다. ⓒPARK IN KWON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난로 연료통에 기름이 넘치지 않도록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하는 점이다. 난로 투입구 옆으로 기름양을 표시한 눈금이 있는데 이 눈금이 거의 다 올라간 지점에서 주유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또 하나, 다른 한 명이 주유를 거들어야 할 경우도 있다. 깔때기 다리가 석유난로 투입구에 꽉 끼지 않고 헐거울 때인데 한 명은 깔때기가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게 손으로 쥐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이 기름을 부어야 했다. 요즘 석유통에는 주입구에 플라스틱 주유 호스가 달려 있어 깔때기가 필요 없다.


초중고생일 때 자주 드나들었던 고향 동네 주유소는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석유난로와 보리차, 가래떡

가정집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랜 석유난로에 대한 추억은 또 있다. 겨울이면 안방 석유난로 위에 보리차를 끓이는 양은 주전자가 늘 놓여 있었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보리차는 몸을 녹이는 훌륭한 음료였는데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보글보글 보리차 끓는 소리가 정겨웠고 주전자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가득히 퍼져 나가 천연 가습기 효과도 있었다.


차(茶) 주전자로 끓인 보리 · 옥수수차 ⓒPARK IN KWON


설 명절 때 동네 방앗간에서 뽑은 가래떡이나 가래떡을 채 썬 떡국떡을 석유난로 위에 올려놓고 바싹바싹하게 구워 꿀에 찍어 먹으면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연탄 난방 시대에 석유난로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고 고마운 존재였다.


요즘도 재래시장에 가면 석유난로를 쉽게 볼 수 있는데 그때마다 기억 저편 한 곳에 아련히 살아 숨 쉬는 고향 집 석유난로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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