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두발(頭髮) 검사
두발(頭髮) 검사
#생애 첫 빡빡머리의 경험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 해거름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구슬치기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별안간 옆에서 누가 내 팔을 확 잡아당겨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 어디론가로 데려갔는데, 그곳은 동네 이발소(理髮所)였다.
“이 아이, 곧 중학교에 입학하니 머리 예쁘게 부탁합니다.”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황당하고 말문이 막혔으나 억울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학교도 정해지지 않았고 입학식까지 여유가 있는데 굳이 지금…….”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어차피 깎아야 할 머리, 하루 이틀 미뤄봐야 소용없다며 이발소 주인에게 부리나케 요금을 건네고 나가버렸다.
이발소 주인아저씨와는 구면(舊面)이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내 머리를 손질해 준 주인은 벌써 중학교에 들어가나, 세월 참 빠르네, 하면서 망토처럼 생긴 하얀 이발용 수건을 내 어깨 위에 둘렀다.
아버지가 예쁘게 깎아 달라고 주문하셨다만 중학생은 빡빡머리인 거 알 제?
주인아저씨는 웃으며 농(弄) 삼아 말했지만 듣는 나는 심각했다. 중학생이 되면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을 남김없이 밀어야 한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으나 막상 훤하게 드러난 민머리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눈물이 찔끔 났다.
손아귀의 힘과 손가락을 놀려 작동시키는 수동식 바리캉. 중고등학교 때 이발소에서는 수동식 바리캉을 사용했다. ⓒTamorlan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엄격한 두발(頭髮) 규정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를 박박 민 나는 중학교 1년 내내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다녔다. 70년대 중고생들의 두발 규정은 엄격했다. 남학생들의 머리 스타일은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빡빡머리 삭발 스타일과 빡빡머리보다 눈곱만큼 긴 이부 머리, 뒷머리와 옆머리는 바짝 쳐올리고 앞머리만 2~3cm가량 남겨둔 스포츠형 머리 세 유형이었다. 여학생은 단발머리 스타일을 지켜야 했다.
사복을 입었을 때 남자 중고생들은 눈에 띄는 머리 스타일 때문에 금방 표가 났다. 하지 말라면 하고 싶고, 하라면 하기 싫은 본능적 방어기제는 사춘기 시절 더욱 기승을 부리는 법. 학생들은 있으나 마나 한 머리를 조금이라도 더 기르기 위해 솟구치는 끼를 감추지 않았고, 용모(容貌)와 머리 및 복장 단속의 최일선에 선 교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의 눈길을 밝히느라 날마다 기(氣) 싸움을 펼쳐야 했다.
#공포의 두발 검사
학생과 교사 간 기 싸움이 무참하게 일방적인 참사(慘事)로 빚어지는 때가 두발(頭髮) 검사 시간이었다. 머리 단속은 수시로, 불시(不時)에 이뤄졌다. 머리 검사의 총대는 중학교 때는 학생 주임이나 체육 선생이, 고등학교 때는 학생 주임, 체육 선생 또는 교련 선생이 주로 멨다.
예고 없이 전격적으로 시행하는 머리 검사의 단속 성과를 높이기 위해 선생님들은 나름의 노림수를 썼다. 노림수는 과중한 학습 압박과 다달이 치르는 월례고사의 부담에서 막 벗어나 학생들이 긴장의 끈을 놓기 쉬울 때를 겨냥한다는 뜻인데, 대개 방학 직전이나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또는 개학 초기였다.
평상시에 팽팽하게 전개되던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심리전은 용모 검사 때가 되면 칼자루를 쥔 단속 선생의 완승(完勝)으로 끝났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해당 교과 선생 대신 바리캉을 든 주임 선생이나 체육 선생, 교련 선생이 들이닥치면 학생들 입에서 탄식의 소리와 함께 체념의 표정이 역력했다.
#바리캉과 머리에 뚫린 고속도로
탄식과 체념의 당사자들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얼굴로 스스로에 내려질 엄벌에 떨어야 했다. 수동식 바리캉의 기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침없었다. 뒷머리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또는 윗머리에서 정수리 근처까지 순식간에 고속도로가 뻥 뚫리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바보 캐릭터 맹구를 닮아 낄낄대는 소리가 넘쳐났다.
고속도로가 뚫린 학생들은 하는 수 없이 이발소에서 빡빡머리로 사태를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오기(傲氣)가 지나쳐 똘끼로 충만한 아이 몇몇은 쥐가 파먹은 듯한 머리 그대로 학교에 다니다가 괘씸죄에 걸려 사방팔방으로 바리캉 세례를 받기도 했다.
전동식 바리캉. ⓒBatholith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스포츠형 머리와 과시욕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2학년부터는 빡빡머리보다 1~2mm 정도 긴 이부 머리를 할 수 있었고 3학년 때는 스포츠형 스타일로 멋을 부릴 수 있었다. 스포츠형 머리를 한 학생들은 습관적으로 넘어가지도 않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는 시늉을 하며 있는 폼, 없는 폼을 다 잡았는데, 자기만족 성향의 과시욕이었다.
이부 머리는 조발(調髮) 후 2주가 지나면 머리빗이 머리카락에 고정될 정도로 자랐다. 고등학교 때는 학년과 상관없이 빡빡머리든, 이부 머리든, 스포츠형 머리든 알아서 선택할 수 있었다.
#겨울방학과 머리 기르기
학생들이 마음먹고 머리를 기를 수 있는 기간도 있었는데 겨울방학 때가 그랬다. 두 달간 이어지는 겨울방학 때는 일부러 머리를 깎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중3 겨울방학 내내 길러 제법 덥수룩한 스포츠형 머리로 고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했는데, 동네 친구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선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왜 그리도 머리를 기르고 싶어 했는지, 이젠 빛바랜 추억 앨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