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기 가을 운동회가 끝나고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전교생에게 통과의례처럼 주어진 과제가 있었다. 불조심 캠페인 표어(標語) 공모전에 제출할 표어 적어내기였다. 담임선생의 지도 감독 아래 반 아이들은 일제히 화재에 대한 경각심과 불조심 예방 의식을 고취하는 저마다의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머리를 싸맸다.
불조심 캠페인은 늦가을 무렵 불조심 강조 기간을 정해 전국적으로 시행됐다. 정부 차원의 불조심 표어 및 불조심 포스터 공모전이 대대적으로 열렸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담임선생은 학생들이 참고하도록 칠판에 한두 개의 예시 표어를 큼지막한 분필 글씨로 써놓았다. 예시 표어는 ‘너도나도 불조심, 자나 깨나 불조심’, 아니면 ‘꺼진 불도 다시 보자’였고 해가 바뀌어도 다르지 않았다. 소방청 자료에 따르면 예시 표어 2종은 1946년부터 사용된 국내 최장수 불조심 표어다.
이때만 해도 신문 기사에서 볼 수 있는 세로쓰기 방식이 낯설지 않았는데 불조심 캠페인 표어도 세로로 적어 내려갔다. 어린 학생들의 머리에서 나온 불조심 표어 중에는 자유로운 동심(童心)에서 비롯된 기발하고 신선한 것도 있었고, 흥미로운 것도 있었다.
#불조심 표어 이모저모
어렴풋한 기억의 물길을 길어 올려보면 ‘내가 버린 담배꽁초, 산불 나고 큰 불난다,’ ‘너도나도 불조심, 우리 모두 불조심,’ ‘불조심에 예외 없고, 방심하면 큰일 난다,’와 비슷한, 제법 표어다운 것들이었다. 글짓기를 잘하는 아이들이 불조심 표어 창의 능력도 뛰어났다.
그런가 하면 표어 흉내는 냈으나 예시 표어를 모방하거나 어색한 표현도 있었다.
‘불장난은 나쁜 짓, 나쁜 짓 하면 불난다,’ ‘한번 끈 불 다시 보자, 두 번 보고 세 번 보자,’ ‘산에서는 산불 조심, 집에서는 연탄불 조심,’ 따위가 그랬다.
#어느 개그맨의 촌철살인 풍자
불조심 표어와 관련해 어느 개그맨이 소개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일화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슬립 스틱(몸 개그) 일색이던 70년대 초 방송계에 대학생 출신 코미디언으로 혜성처럼 등장해 풍자적 재담(才談)이란 새로운 유형의 개그를 선보이며 선풍적 인기를 끈 개그맨이었다.
모 라디오 방송에서 불조심 캠페인 표어의 대명사처럼 굳어진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의 논리적 모순과 비현실성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소개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꺼진 불은 아무리 다시 봐도 꺼진 불일 뿐이라 다시 볼 일이 없는데, 언제까지고 하염없이 보고 또 봐야 하는지 속 터지게 하는 무책임한 표어라고 비판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꺼진 라이터 불을 다시 보느라 외삼촌이 삼 일 밤낮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의 지적은 분명 일리 있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제안일 뿐, 절대 남을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인데 그런 식의 배경 설명에 사람들은 또 한 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천편일률적 웅변대회 주제
교내 웅변대회도 1년에 한두 차례씩 열린 연례행사였다. 학년별 예선을 거쳐 본선 진출자 중 입상자를 가렸고, 수상자들은 상장과 상품, 동료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웅변대회 주제는 대개 반공(反共), 호국(護國), 보훈(報勳) 의식 함양과 국력(國力) 신장 일변도의 뻔한 내용이었다.
웅변대회의 주제가 천편일률적이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웅변대회는 애국심 함양과 반공사상 강화를 위한 정부 시책을 반영한 프레임 아래 진행돼 연사(演士)로 나선 학생들로서는 이렇다 할 선택권이 없었고 사전에 설정된 주제와 방향성에 맞춰 각자 웅변 원고를 준비할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웅변대회 연사(演士)와 학생들의 대조적인 자세
웅변대회 장소는 전교생들이 모인 운동장이었고 참가자들은 엄숙한 얼굴로 그럴듯한 손짓과 몸짓을 섞어 목청을 높였다. 듣는 학생들은 참가자들의 웅변 내용을 경청한다기보다 그들의 표정과 제스처에 관심을 보였고 이따금 맞장구를 치는 추임새를 넣어 좌중(座中)을 웃겼다.
진지한 청중의 자세보다는 가볍게 웃고 즐기는 만담 무대의 관람객 성격이 짙었던 학생들과 달리 웅변대회 참가자들은 표정 처리와 몸놀림 하나하나, 고저장단(高低長短)의 목소리 등 연사(演士)나 다름없이 열(熱)과 성(誠)을 다하는 책임감에 충실했다.
#연사들의 공통점
연사 모두에게서 일관되게 나타난 공통점도 있었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법칙처럼 고저장단이 뚜렷하고 일정한 패턴을 보이는 목소리 톤이나 좌우로 번갈아 그네 타듯이 고개를 휘젓는 모습이 그랬다.
또 하나 기억나는 점은 희한하게도 웅변대회 연사들의 클로징 멘트가 일란성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이다.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좌우로 한 번씩 힘차게 고개를 돌리면서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 하고 끝맺는 대목이다. 연설에 종지부(終止符)를 찍는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그들은 두 손을 위로 활짝 펼치는 제스처를 취하곤 했다.
웅변대회가 일상적으로 열릴 때라 시내 곳곳에 웅변학원이 여럿 있었고 호황을 누린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