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18. 장운수 감독과 계성고 축구부

by 박인권

장운수 감독과 계성고 축구부


#축구부 재창단

계성고 축구 재창단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한 명을 꼽는다면 장운수(張雲洙) 감독(1928~1992)이라는 데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73년 말 해방 전 해체된 축구부 부활의 산파역을 맡아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온 장운수 감독은 재창단 2년째인 1975년 팀을 전국대회 정상으로 이끌며 계성고 축구부의 제2의 전성기를 예고했다.


#당대의 명조련사 장운수 감독

경신고 3학년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돼 화제를 모은 차범근(1953~)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장운수 감독은 당대(當代)의 명조련사로 확고부동한 입지를 구축한 터라 축구 명문 경신고 감독을 그만두고 신생 지방팀 감독을 맡았다는 사실은 당시 축구계의 깜짝 뉴스였다.


될성부른 재목(材木)을 알아보는 눈이 남달랐던 장운수 감독은 전국 각지를 누비며 전도유망한 선수들을 직접 스카우트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방식으로 조련시켜 창단한 지 채 2년도 되기 전에 팀을 전국대회 우승권 전력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경기에 앞서 운동장에 도열(堵列)해 있는 계성고 축구 선수들. <사진=계성중 68회 졸업 앨범>


#대구 지역 고교축구의 선두 주자 청구고

1970년대 중반 대구 지역 고교 축구팀은 계성고보다 1년 먼저 창단한 청구고와 대륜고, 협성 상고(1985년 인문계고로 전환하며 협성고로 개명), 대구에서 한 시간 거리의 현풍고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선두 주자는 청구고였다. 청구고는 창단 첫해인 1973년 문교부장관기 전국 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며 고교축구의 새로운 강자로 고개를 내밀었고, 계성고는 대구 지역 최강 청구고를 따라잡아야 하는 후발주자였던 셈이다.


#현풍고와 박용주

1971년에 창단한 변방의 현풍고 축구부는 1973년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으나 1975년 4월 성적 부진과 재정 악화로 4년 만에 축구부 문패를 내리고 말았다. 현풍고는 박용주라는 걸출한 공격수를 배출했는데, 한때 국가대표를 지내기도 했으나 방랑벽(放浪癖)에 발목이 잡혀 기량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졌다.


재창단 첫해인 1974년 대구 문화방송 사장기 경북 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며 본격적으로 고교축구계에 데뷔한 계성고는 이듬해 8월 마침내 문교부장관기 쟁탈 전국 고교축구대회 정상에 오르며 중앙 무대의 주목을 받게 됐다.


#재창단 첫 우승의 감격

여름방학 기간에 열린 대회 결승 상대는 전통의 강호 중동고였고, 중고등학교 전교생들이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렬히 응원전을 펼친 기억이 생생하다. 치열한 접전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공동우승을 차지했는데 그때의 흥분과 기쁨은 거짓말처럼 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1975년 여름 첫 우승 당시의 주요 선수들 이름과 경기 장면이 아른거리는데 기억나는 대로 그날의 풍경을 되살려 보면 이렇다.


#첫 우승의 주역들

한국 프로축구 K리그 통산 100호 골의 주인공이자 프리킥의 달인 유태목(67), 축구 국가대표 출신 오범석(40)의 아버지로 고교축구 골키퍼 랭킹 1위였던 오세권(68), 발재간과 돌파력이 뛰어난 2학년생 스트라이커 김태수(66), 묘기에 가까운 개인기로 눈길을 끈 김영수, 1년 뒤 계성고 2대 감독으로 부임한 정종덕 전 건국대 감독의 동생 정종관(67), 현재 스포츠 에이전트 회사를 운영 중인 철벽 수비수 이영중, 이름이 특이해 기억하는 이만달 등이 있었다.


유태목은 30m 이상 떨어진 먼 거리에서 골망을 가르는 호쾌한 중장거리 프리킥이 일품이었고, 2학년이면서 주전 골잡이로 활약한 김태수는 개인기도 뛰어났지만 할리우드 액션에도 능한 영리한 선수였다. 상대 페널티 박스 안에서 돌파 중 고의적인 반칙으로 넘어진 것처럼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치며 페널티킥을 곧잘 얻어내 단숨에 승부의 흐름을 뒤바꾸곤 했다.


모교 운동장에서 연습경기를 할 때 김영수의 개인기는 단연 두드러져 구경하는 우리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었는데, 영남대 진학 후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안타까워한 기억이 있다.


1975년 대구시민운동장에서 벌어진 계성고와 대륜고와의 경기 장면. <사진=계성중 68회 졸업 앨범>


#장운수 감독의 지도력

장운수 감독은 계성고 축구부가 제2의 전성기로 진입하는 초석을 다진 뒤 1976년 안양공고 감독을 맡아 떠났으며 이후 연세대 감독(1978~1980)을 거쳐 프로축구 부산 아이파크의 전신(前身) 대우 로얄즈 감독(1981~1983, 1985~1986, 1984년은 총감독)을 역임했다.


연세대 감독 시절 계성고 제자인 유태목, 오세권, 김태수 외에 국가대표 공격수 정해원(1959~2020)과 국가대표 수비수 이장수(1956~) 등 쟁쟁한 선수들을 길러냈다.


1984년 프로축구 리그 도중 경질된 조윤옥 감독(1940~2002)을 대신해 총감독 신분으로 선수단을 지휘해 프로축구 대제전 정상에 등극하며 대우 로얄즈에 첫 패권을 안겼다. 198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긴 투병 끝에 1992년 연말 무렵 향년 64세를 일기(一期)로 타계(他界)했다.


#계성고 축구부 2대 감독 정종덕

장운수 감독 후임으로 계성고 감독을 맡은 정종덕 감독(1943~2016)은 1976년 전국대회 3관왕을 달성하며 계성고 축구부의 전성기를 견인했다. 19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간 건국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황선홍(1968~), 유상철(1971~2021), 이영표(1977~)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육성하는 등 축구계를 풍미(風靡)했다.


#대구 지역 고교축구의 복병, 협성 상고

유달리 축구를 좋아했던 중학교 시절, 계성고와 청구고 외에 인상적인 팀이 있었는데 협성 상고 축구부였다. 협상 상고는 대구 지역 고교축구의 다크호스, 복병이었다. 지역 대회 우승권 전력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중요 길목에서 강팀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저력을 갖춘 끈적끈적한 팀이었다.


무엇보다 협성 상고가 내 눈길을 끈 이유는 팀원들의 플레이가 거칠기 짝이 없어 경기 때마다 파울이 쏟아졌고 경고 누적이나 퇴장을 당하는 선수가 어김없이 나왔다는 점에서다. 경기 초반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흐름을 유리하게 이끌 의도였고 실제로 그런 경기가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위험하고 쓸데없는 반칙을 남발하는 바람에 경고나 퇴장 선수가 속출했고 전력손실의 역효과를 낳아 결국 경기를 그르친 경우가 잦았다.


#협성 상고 전술의 빛과 그림자

가령 전반 중반까지 작전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듯하다가도 전반 후반을 넘어가면서 퇴장 선수가 나오는 등 공수(攻守) 균형에 균열이 생기면서 주도권을 뺏기기 일쑤였다는 점에서 좋은 전술이라고 할 수 없었으나 나쁜 전술도 아니었다.


팀 전력이 중상위권인 협성 상고 입장에서는 어차피 정상적인 맞대결로서는 대어(大漁)를 낚을 수 없는 처지라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변칙적이고 모험적인 승부수를 띄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이런저런 이유로 협성 상고 경기를 여러 번 관전했는데 골키퍼가 공중 볼을 잡기 위해 높이 뛰어올라 상대 선수의 턱을 주먹으로 때린다거나 문전 혼전 중에 수비수가 상대 공격수의 얼굴이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하기도 하고 한쪽 팔을 낚아채듯 잡아 돌파를 방해하고 자빠뜨리는가 하면 공과 상관없는 과격한 백태클을 시도하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었다. 한두 번 주심의 눈을 속이고 넘어가다가도 비슷한 반칙을 되풀이하면서 끝내 퇴장 조치를 당해 경기를 망친 적이 적지 않았다.


협성 상고와 맞붙는 팀은 육박전을 방불케 하는 무지막지한 플레이에 위축되기 마련이었고 상대 팀 감독도 대책 마련에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며 주심과 부심들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1975년, 계성고 운동부의 전성기

1975년은 계성고 유도부와 농구부도 나란히 전국대회 3관왕에 올라 모교의 명예를 빛낸 해였다. 흑백 TV로 중계한 춘계, 추계 전국 남녀 고교농구대회 결승에서 맹활약한 김태범과 김여진 선수 이름을 기억한다.


중학교 1학년 시절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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