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17. 축구 단체 응원과 패싸움
축구 단체 응원과 패싸움
#중고등학교 운동부
내가 다닌 중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다. 학교 재단의 상급학교인 고등학교에도 축구부가 있었다. 중학교 축구부는 성적이 고만고만했으나 고등학교 축구부는 70년대 중반 전국대회 우승을 놓고 다툰 고교 축구의 강호(强豪)였다.
내가 어릴 때 남자아이 치고 축구를 좋아하지 않은 아이가 별로 없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골목 축구, 운동장 축구에 푹 빠진 나는 특히 더 그랬다. 교문(校門)이 같고 교정(校庭)이 한 울타리에 있었던 중고등학교에서는 축구부 외에도 유도부, 농구부, 체조부 등 다수의 운동부를 운영해 체육 특기자 육성 학교로도 명성이 높았다.
축구와 마찬가지로 농구와 체조 종목에서도 중학교 팀보다 고등학교 팀의 성적이 월등히 뛰어나 학교 차원의 단체 응원은 고등학교 운동부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고 그 중심에 축구부가 있었다.
#해방의 메시지, 전교생 단체 응원 통보
운동부가 있는 학교 학생들이 다 그러했듯이 우리 학교 아이들도 대회에 출전한 고등학교 축구부를 응원하러 가는 날이면 모두가 들뜬 마음에 겨워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이 경기장으로 단체 응원을 가는 것을 좋아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나, 그렇지 못한 아이나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학교 일과(日課)에 지치기 일쑤였고 학급 종례(終禮) 시간에 내일, 전교생 단체 응원이다, 라는 담임 선생의 통보는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푼 해방의 메시지였다.
중학교 1학년 봄 첫 단체 응원을 간 대구시민운동장 현장. 경북 고교축구대회 청구고와의 결승에 앞서 모교 선수들이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관중석 가운데 통로 왼편으로 악대부 모습이 보이고 그 아래 모교의 이름이 적힌 대형 현수막과 교기(校旗)를 든 응원부원들과 지도교사가 서 있다. <사진=계성중 68회 졸업 앨범>
#1973년 말 재창단된 고등학교 축구부
고등학교 축구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0년대 고교 축구의 강자로 군림하다 해방 전 해체됐다가 1973년 말에 재창단된 뒤 제2의 전성기를 맞았으나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81년에 또 한 번 해체되고만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은 유도부만 남아 예전과 같은 대규모 단체 응원 문화는 빛바랜 추억 앨범 속에서나 볼 수 있다.
1975년 중학교 1학년 봄, 처음으로 고등학교 축구팀 단체 응원을 하러 갔다. 축구 경기가 벌어진 장소는 대구시민운동장으로 대구문화방송 사장기(社長旗) 쟁탈 경북 고교축구대회 결승전이 벌어진 날이었다. 대구시민운동장은 2018년 개장(開場) 70년 만에 축구전용 구장으로 리모델링 됐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됐다.
#첫 단체 응원의 추억
첫 단체 응원의 경험은 강렬하면서도 짜릿했다. 우리 학교 축구부의 선전을 기원하는 대형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고 운동장 트랙 앞에 줄지어 선 10여 명의 고등학교 응원단 단원들이 힘차게 교기(校旗)를 흔들며 응원 열기를 북돋웠다.
처음 보는 화려한 응원단의 군무(群舞)와 악대부의 연주 소리, 4,000명에 이르는 양교(兩校) 학생들의 뜨거운 함성과 응원가 열창, 동문 선배 졸업생들의 박수갈채, 잔디 구장에서 숨 막히게 펼쳐지는 선수들의 치열한 몸싸움과 발재간에 눈과 귀가 즐거웠고 그 여운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친구들과 맨땅에서만 공을 찼고 맨땅에서만 경기하는 모습을 본 나로서는 신기하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내가 나온 중학교 축구부원들. 앞줄 맨 오른쪽에 앉은 아이는 나와 초등학교 동기로 싸움 실력으로도 전교(全校) 최고 주먹이었다. <사진=계성중 68회 졸업 앨범>
#교복 응원과 응원가
무대 복장처럼 생긴 멋진 유니폼을 입은 응원단장의 시범에 따라 학생들은 일제히 단추를 풀어 제친 교복 상의를 두 손으로 맞잡았다. 상의는 약속된 손의 움직임에 따라 펼쳐지고 닫히기를 반복하며 장관(壯觀)을 연출했는데, 반대편 관중석에서 보면 수천 마리의 새가 질서 정연한 날갯짓을 하는 모양이라 탄성을 자아냈다.
첫 단체 응원이 기억에 잊히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 우리 학교가 1-0으로 앞선 후반 종료 3분 전, 응원석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눈앞에 보이는 우승의 기쁨을 앞당겨 만끽하며 자축(自祝)의 분위기에 겨워 열광적인 응원전을 펼치고 있었다.
#꽃미남 가수 이현의 히트곡 ‘잘 있어요’
대중가요는 당대의 꽃미남 10대 가수 이현(1950~)이 부른 히트곡 ‘잘 있어요’, 라는 노래였다. 1973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승리가 확정적일 때 이기고 있는 팀에서 상대팀에게 집으로 잘 가라고 약 올리는 뜻으로 부른 응원가였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와 경쾌한 리듬이 승전가(勝戰歌)로 잘 어울렸다. 요즘에도 프로축구 경기장 응원석에서 부르는 것을 보면 불멸의 응원가라 할만하다.
1973, 1974년 연거푸 10대 가수에 뽑히며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이현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군번(軍番) 1번으로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1920~2002) 장군이다. 내가 친구들과 응원석에서 목청껏 이 노래를 외쳐 부른 1975년, 이현은 5년 간의 가수 활동을 돌연 중단하고 가요계를 떠났다.
#초대형 악재 발생
그런데 승전가에 취해 다들 어깨동무 춤을 추고 있을 때, 초대형 악재가 터졌다. 우리 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양 팀 선수들이 혼전을 벌이던 중 주심(主審)이 페널티킥 파울을 선언하는 대형참사가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 팀 감독과 선수들이 편파 판정이라고 격렬히 항의했고 응원석에서도 야유의 함성이 끊이지 않았으나 주심의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사실상 승부가 끝난 상황에서 어처구니없이 얻어맞은 페널티킥 한방에 모교 선수들은 멘탈 붕괴에 빠졌고 그 결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역전패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패색이 짙던 청구고는 동점을 만들며 기사회생한 뒤 경기장 안팎에서 계속된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1분 후 역전 골마저 넣으며 승부는 끝이 났는데 이때부터 불미스러운 사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까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관중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벌어진 경기 모습. <사진=계성중 68회 졸업 앨범>
#본부석 단상 점거와 거리 시위
우리 팀 코치진과 선수들은 주심을 에워싼 항의를 계속했고 흥분한 학생들이 응원석을 박차고 뛰쳐나가 운동장 안으로 난입해 골대를 부수고 본부석 단상을 점거하며 농성(籠城)에 돌입했다.
양팀 응원단끼리도 시비가 붙어 거친 몸싸움을 펼치며 일촉즉발의 전면전 위기에 봉착했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청구고 학생들이 서둘러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더 이상의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청구고 학생들의 조치는 학생들 스스로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교사들의 강력한 만류, 즉 선견지명에서 비롯돼 다행스런 마무리로 매듭되는 듯 했으나 사태는 거리 시위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치달았다.
경기 무효와 재경기를 요구하던 우리 학교 학생들의 농성 대열에 동문 선배들까지 가세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마침내 거리 시위로 확전되고 말았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대회 주관사인 경북체육회까지 행진한 뒤 대구 문화방송국으로 방향을 틀어 시위를 이어갔으나 신천교 일대에서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분위기에 휩쓸린 나도 우리 반 친구들과 멋모르고 운동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객기를 부렸다. 군중심리의 실체를 몸소 체험한 이때 통제 불능의 흥분 지수가 솟구치는 한편 덜컥 겁이 나는 불안 지수도 동반 상승했다.
나와 친구들이 날뛰는 모습은 곧바로 선생님들에게 발각됐고 혼쭐이 난 우리는 이내 귀가했는데 이날의 판정 시비 사태는 지역 일간지 사회면에 보도될 정도로 파장이 컸다.
#축구 때문에 앙숙지간이 된 양교(兩校)
청구고 재단과 친분이 깊은 경북 축구협회장의 입김에서 비롯된 편파 판정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계성고 축구부와 청구고 축구부는 지역 라이벌을 넘어 앙숙지간(怏宿之間)이 됐다.
학창 시절, 축구 단체 응원은 과중한 학업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애교심을 함양하고 동기(同期)간에 우정을 다지며 선후배끼리 의기투합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효과 만점의 활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