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19. 도시락의 추억
도시락의 추억
#해방(解放)의 장(場)이었던 점심시간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간 존재를 떠받치는 근원적 욕구의 발로(發露), 먹는 즐거움은 누구에게나 즐겁다. 식욕이 왕성한 70년대 성장기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점심시간은 먹는 행위에서 저절로 오는 행복감을 만끽하며 과중한 입시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해방(解放)의 장(場)이었다.
학교 급식 체제가 없던 당시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도시락을 싸 다녔고 방과 후 야간 자율학습을 시행하던 중3 시절과 고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두 개씩 준비하는 일도 많았다. 나는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 도시락을 들고 등교했고 그 일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됐다.
#공짜 분말 우유와 단팥빵
기억을 더듬다 보니 초등학교 1학년 점심시간에 식사 대용으로 공짜 분말 우유와 빵을 먹은 적도 있었는데 그때뿐이었다. 또 사회봉사 활동 차원에서인지, 홍보마케팅 차원에서인지는 몰라도 낯선 제복 차림의 아저씨들이 초등학교 교실을 돌며 삼립식품 단팥빵을 간식으로 나눠준 일도 있었다.
우리 집은 3형제라 중고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매일 새벽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6개씩 도시락을 챙기느라 바쁘게 손을 놀려야 했다. 70년대 중후반까지는 보온(保溫) 도시락이 상용화되기 전이라 밥과 반찬을 같이 담은 양은 도시락통이나 별도의 반찬통을 들고 다녔었다. 밥과 국, 반찬을 별도 용기에 담은 보온 도시락은 고3 때 처음 이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밥과 계란프라이, 소시지구이, 볶음김치가 함께 담긴 옛날식 양은 도시락. ⓒ피이터어팬/http://plusupspeed.tistory.com/108 (archiv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도시락통과 석탄 난로
맨 처음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초등학교 5학년 때가 생각난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쌀쌀한 늦가을이 되면 등교 후 보자기로 싼 도시락통을 둘러싼 진풍경이 연출되곤 했다.
이른 아침에 싼 도시락밥은 보온 기능이 없어 금방 식고 점심시간이 되면 냉기 가득한 찬밥이라 석탄 난로 위에 도시락통을 경쟁하듯 층층이 쌓아 놓았는데 올릴 수 있는 도시락 수가 기껏 스무 개 남짓이라 서로 먼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아우성을 쳤었다.
70년대 초 초등학교 한 반의 학생 수가 70명을 넘나들어 벌어진 일이었고 그나마 난로 윗자리로 밀려난 도시락은 뚜껑을 열어봤자 온기(溫氣)도 돌지 않았지만, 아예 난로 덕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교실 난방이라고는 고작 교탁(敎卓) 옆 석탄 난로 하나뿐이라 냉골이나 다름없는 양은 도시락밥을 떨면서 먹는 아이들이 많았고 손이 곱아서 젓가락질하기도 불편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차디찬 밥알을 빠른 속도로 욱여넣었고 도시락이 다 비워질 때까지 깔깔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난로에 석탄을 채우는 일도 늦가을부터 겨울방학 전까지 학생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난로 당번은 운동장 쓰레기 처리장 옆 석탄 더미 창고에서 양동이에 석탄을 수북이 담아 교실로 옮겨야 했는데 무게가 만만찮았다. 각 학급의 당번들이 석탄 더미 창고에 몰려들 즈음에는 소사(小使)라고 부른 나이 지긋한 아저씨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소사는 학교나 행정기관에 거주하면서 잔심부름과 경비 업무를 처리하는 일꾼을 말한다.
70년대 도시락 반찬으로 흔했던 콩자반. ⓒPARK IN KWON
#개방된 사담(私談)의 장터, 점심시간 자리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도시락 문화는 각 학교 교실에서 시끌벅적하게 펼쳐졌다. 3교시가 끝나고 시작되는 점심시간 훨씬 전부터 아이들의 뱃속에서는 꼬르륵, 거리는 도시락 호출음이 주인을 재촉했고 참기 힘든 아이들은 서둘러 자투리 휴식 시간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임무를 완수했다.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보다 점심시간을 어기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도시락을 까먹는 점심시간은 학생들의 하루 일과(日課) 중 가장 흥겹고 자유분방한 때였고 점심 식사 자리는 거침없이 수다를 떨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개방된 사담(私談)의 장터였다.
#만화경 같은 점심시간 풍경
중고등학교 시절의 만화경(萬華鏡) 같은 점심시간 풍경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점심시간 전에 몰래 도시락 까먹기.
하이라이트는 1교시가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먹어 치우는 경우다. 아침을 거른 탓에 허기를 참지 못해 일찍 끼니를 해결하고 수업 시간에는 대놓고 조는 극히 소수의 사례다. 이런 아이는 딴짓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꼴딱 새웠거나 유독 아침잠이 많은 만성 잠꾸러기 스타일이기 십상인데 수업 시간 내내 졸다가 걸려 혼나기 일쑤였다.
몰래 도시락 까먹기는 버릇처럼 늘 하는 아이가 했고 조는 것도 늘 조는 아이가 졸았다.
도시락 반찬으로 빠지지 않았던 멸치볶음. ⓒPARK IN KWON
이에 비하면 점심시간 한 시간 전에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은 양반이었다. 점심 식사의 속도위반은 주로 이때 이뤄졌다. 속도를 위반하는 아이가 다수이다 보니 수업 시간에 반찬 냄새가 안 날 리가 없을 텐데도 선생님들은 알고도 모른 채 넘어갔지만, 일부 깐깐한 교사들은 꼭 지적하고 넘어가기를 잊지 않았다.
드물게 담임 선생이 점심시간 때 도시락 검사를 하는 일도 있었다. 검사 목적이 점심시간 준수라는 주의 환기용이라 별도의 조치가 없었고 뒤탈도 없었다.
*식사 자리의 형태와 도시락 먹는 방식
도시락을 혼자 따로 먹는 아이는 별로 없었고 친한 친구 둘이 마주 보고 먹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는데 삼삼오오 모여 식사하는 아이들도 제법 많았다. 삼삼오오는 서너 명이나 대여섯 명을 가리키는데 우리 반에서는 서너 명이 반찬통을 풀어 제치고 나눠 먹는 장면이 흔했다.
셋 이상 합석하면 어쩔 수 없이 계란프라이나 소시지 반찬, 소고기 장조림을 서로 먹겠다고 다퉜고 식용 메뚜기를 튀겨 간장과 들기름에 졸인 반찬도 인기였다. 흔한 밑반찬이었던 콩자반을 숟가락 채 듬뿍 떠서 먹다가 반찬 주인 아이에게 딱밤 세례를 받기도 했다. 아예 대놓고 김치 한 가지만 싸 오는 간 큰 아이도 있었으나 아이들 모두 그러려니 하고 다 이해하고 넘어가는 인정머리도 있었다.
아이들이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계란프라이가 인기 반찬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어머니들이 아예 밥 밑에 깔아 보이지 않도록 도시락을 싸는 일도 적지 않았다.
요즘의 보온 도시락. ⓒPARK IN KWON
몇 해 전 향수를 자극하며 인기를 끌었던 80년대 후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나왔던 것처럼 서너 명의 밥과 반찬을 양푼에 모두 쏟아붓고 고추장에 비벼 먹는 비빔밥은 내가 다닌 학교 점심시간 때 볼 수 있었던 장면은 아니었다.
아주 별난 방식으로 도시락을 먹는 아이도 있었다. 일명 유목민(遊牧民) 또는 방랑객(放浪客) 식사라 불렀는데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밥만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서 눈치껏 반찬을 얻어먹는 유형이었다.
보온 도시락과 세트로 국을 담을 수 있는 용기. ⓒPARK IN KWON
*도시락 반찬
70년대 밥상 문화에서 고기반찬, 생선 반찬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고 학교 도시락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고기나 생선 반찬이 귀한 대신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책상 위에 꺼내 놓은 반찬통에는 밑반찬이나 다양한 즉석 반찬이 넘쳐났다. 아이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 반찬을 나열하면 이렇다.
한국인의 필수 먹거리인 김치와 깍두기를 필두로 무채, 감자조림, 깍둑썰기해서 익힌 고구마에 설탕물을 입혀 졸인 고구마 맛탕, 콩자반, 시금치 따위의 나물무침, 콩나물무침, 오이지, 무말랭이, 멸치볶음, 어묵볶음, 볶음김치, 우엉조림, 새우 조림, 마늘장아찌, 깻잎장아찌, 달걀옷을 입힌 소시지구이, 소고기 장조림, 계란프라이, 김 따위였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요즘의 반찬 문화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려한 색상과 세련된 디자인의 보온 물통. ⓒPARK IN KWON
#수능(修能) 도시락
초중고생 모두 급식(給食) 문화에 익숙한 지금의 아이들도 도시락을 먹을 때가 있는데 수능 때가 그렇다. 수능 시즌만 되면 대목을 노린 요식(料食) 업체들이 ‘명품 수능 도시락’이니 ‘합격 보장 수능 도시락’이니, 떠들면서 홍보전을 펼치는 상술(商術) 마케팅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광경(光景)이다.
옛날식 양은 도시락은 젊은이들의 레트로 취향을 자극하는 곳곳의 음식점에서 요즘도 만나볼 수 있지만 그때의 감흥과 정취까지는 살릴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다.